‘나는’ 장애와 비장애 형제를 둔 엄마입니다. 1화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라는 비장애 형제 자조모임 ‘나는’이라는 글을 읽었다.
과거, 나는 '장애'까지는 아니더라도 '핸디캡'이 많은 '언니'라는 존재로 인해 부모에게 철저하게 ‘타자’로써 존재했던 경험이 생각난다.
그리고 현재 나는 장애와 비장애 형제 둘을 키우며, 두 아이 사이의 나의 관심과 감정이 '어쩌면 나의 어린 시절 내 엄마의 모습이었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글을 쓰며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연결 짓는 나의 솔직한 경험담과 감정이, 이 책에서처럼 '장애 형제자매'로 인해 철저하게 '타자'로 외면받았을 그 상처로부터 조그마한 위로가 되어보길 바래본다.
어릴 적, 귀가 기형으로 태어난 언니는 늘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귀 한쪽이 잘려져 나간 형태로 태어나, 언니는 초등학교를 갈 무렵이 되자, 머리카락으로 귀를 가리다 못해 사람을 대면하기 싫어하는 '대인기피증 증상'까지 보였다.
'1970년대' 성형이 흔하지 않았던 그 시절, 엄마는 언니의 귀를 '성형 수술'해 주었다. 집안 형편이 녹록지 않았음에도 엄마의 아픈 손가락은 그렇게 엄마의 관심 속 중심에 서있게 되었다.
언니는' 영구치'가 나오기 시작하자 대문작의 앞니가 심한 덧니로 발현되었다. 그 시절만 해도 '치아교정'이라는 것이 대중화되기 이전이라 '동네치과'를 전전하던 엄마는 언니를 데리고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때 돈 500만 원으로 언니 치아교정을 위해 전세보증금을 빼냈다.
엄마의' 아픈 손가락'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언니는 연이어 '약시' 판정을 받았고, 안경 압축기술이 흔치 않았던 그 시절... 어마하게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게 되었다. 언니는 친구들로부터 "왕눈이" "안경잡이"라는 놀림을 받았고, 엄마는 그런 언니가 늘 안쓰러워 했다.
신학기가 되면 늘 엄마는 화장을 하고, 일 년에 한두 번 꺼내 입을까 말까 한 유행 지난 치마 정장을 차려입고는 학교를 찾아갔다. 언니의 자리를 교실의 맨 앞쪽에 앉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에 비해 나는 너무나 순탄하게 커 가는 동생이었다. 엄마는 ‘너는 손하나 댈 게 없어서 편하다 ‘ 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그것이 '고맙다'는 표현이였으면 하고 바랬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언니는 늘 식탁에 앉아 숙제를 했다. 엄마가 옆에 앉아 하나하나 시키고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언니는 늘 성적이 좋았다. 그래서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자 '관심'의 대상인 언니는 '기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나도 공부를 잘해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었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놀림받지 않을 정도까지는 '기초학력'을 다지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하는지도 몰랐고, 머리도 그다지 좋지 않았던 나는, 그저 공부가 싫어지기만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오직 언니 공부에만 몰두한 나머지, 나는 숙제마저 해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집안의 분위기가 나에게도 발동했을까? 나도 언니를 '보살펴야 하는 존재', 또는 '나를 희생해서라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학교에 도착해서 책가방 속 교과서를 챙기는데, 우리 반 앞문에 언니가 보였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어도 언니는 좀처럼 나를 잘 찾아오지 않았는데 왼일인가 싶었다.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실내화'를 안 갖고 왔고, 언니의 담임은 무서운 선생님이라서 혼이 날 거 같다고 말했다. 나는 얼른 나의 '실내화'를 벗어 언니에게 주었다.
그날 나는 담임선생님께 혼이 났고 하루 종일 양말만 신은 채 학교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어린 나는 '언니처럼 아프고 연약하면 관심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그 생각에 사로 잡혀 필통을 꺼내 그 속에 연필 깎는 '커터칼'로 손가락을 그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날 나는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몇 대나 맞는 심한 혼줄이 났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나는..... 아파서도 안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