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를 통해 시대의 기후를 읽어야 한다
9월 24일 서울 도심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라는 슬로건 아래 기후정의행진'이 진행되었다. 3만 5천여 명의 참가자들은 종이 상자를 잘라 만든 피켓을 들고 기후위기의 절박함을 세상에 알렸다. 이날 행사는 노동, 농민, 여성, 장애인, 동물권, 환경, 종교 등 400여 개의 단체가 공동 주최하여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인 우리가 기후정의 주체로 나설 것”임을 천명했다.
그런데 왜 기후정의인가? 도대체 기후가 정의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부의 척도가 되는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이라는 개념은 일정 기간 한 국가에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시장 가치를 합한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지표가 자연을 파괴하거나 오염물질을 내뿜거나 심지어 죽음을 양산할지라도 수치상으로 양의 부호를 나타낼 때, 이를 성장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가치가 이윤으로 환원되는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다. 그것을 기후가 증명한 것이다. 변화를 넘어 재난에 이른 기후위기는 노동자, 농민의 위기이며 여성, 장애인의 위기이다. 모든 생명과 환경의 위기이다.
24일 서울 중구 숭례문 일대에서 열린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924 기후정의행진 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기후위기 경고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출처: https://vop.co.kr/A00001620163.html
만약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유입되는 석유, 전기, 공산품, 농산물 등의 경로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것을 30년 전과 비교해 본다면? 어마어마한 자원과 에너지를 점점 더 빨리, 점점 더 많이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를 쓴 울리히 브란트와 마르쿠스 바센은 자본주의 중심부의 일상생활이 전 지구적 척도에서 노동력과 자연 자원 및 흡수원에 대한 무제한적 접근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전 지구적 착취로 유지되는 삶의 방식을 브란트와 바센은 ‘제국적 생활양식’이라고 표현한다. 문제는 제국적 생활양식이 자기 비용을 전가할 수 있는 외부를 지니는 동안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중심부에는 봉쇄와 배제를 통해 그 생활양식을 배타적으로 안정화시키려는 시도가 남을 뿐이다.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할 때 먼저 피해를 입는 사람은 저지대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미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은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탄소배출에 대한 책임이 없음에도 말이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통해 시대의 기후를 읽어야 한다. 이윤보다 생명이 우선이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영토를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 세계’에서 분리하고, 지구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낼 생각이 없다. 공룡부터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를 짓밟고 앉아서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
그림 출처: https://www.hani.co.kr/arti/983622.html
위 글은 단대신문 1495호(2022년 9월 27일 발행)에 개재된 글입니다.
http://dknews.dankook.ac.kr/news/articleView.html?idxno=18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