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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견디는 방식

by ㄱㄷㅇ

어느새 올해도 오십여 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대학가여서 서서히 분주해지고 있어요. 곧 봄이 올 테고,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디디는 학생들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다만 여전히 한낮의 냉기는 차갑다고, 따뜻하게 입으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을 때마다 지금을 바라보게 되는 건 지나간 시간을 부정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곱씹게 되고요.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들이 증명되지 않는 것에 속이 아려서 아침이 올 때까지 잠에 들지 않기도 합니다.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고 말한들 들어주던 이들은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이렇게 홀로 스러진다면 지금껏 나를 지탱해 온 마음을 부정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이렇게 변하는 것 없이 매일을 똑같은 상태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차마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도 없어요. 나는 과거를 답보하고 있기에, 타인에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고, 이미 그들은 나에게 지쳐버렸을 테니까요.


며칠 전에 함께 일하는 직원이 그랬어요. '눈에 감정이 없다'라고. 분명 일을 할 때만큼은 온 힘을 써서 좋은 마음을 가지려고 하는데 순간, 순간마다 지금의 내 상태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직원이 말을 했을 때 우린 서로 웃음을 터트렸어요. 내가 정곡을 찔린 듯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자기가 그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가 있기에 잘 안다고. 세상이 질릴 때 보이는 눈빛이라고 했으니까요.


세상이 질려서.라는 말 참 무섭지요. 겨울이 절정으로 다다르며 세상의 채도가 무척 낮아졌습니다. 바깥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푸르던 마음이 회색빛으로 돌아가요. 보이는 건 계절이고, 날씨인데 내 마음이 이리 동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호르몬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언젠가 가을이 올 즈음 정말로 '세상이 질려'서 매일이 정말 지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을 견디기 위해 저는 아무도 모르게 잠시 바다로 향했습니다. 바다는 언제나 그랬듯 같은 모습으로 여전히 그곳에 있었습니다. 바다를 보다가 문득 용기가 생겨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곤 그때 나의 상태에 대해서 말했어요. 한참을 듣던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그거 호르몬 때문이야'라고. 그러면서 인간의 기분과 날씨의 영향, 호르몬이라는 과학적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저에게 친구는 그거는 그저 계절이 바뀔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상태이니 또 봄이 올 때쯤이면 나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우습게도 정말 호르몬 때문이었는지, 날씨에 적응이 되니 그런 마음도 조금은 사라져서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후에도 비슷한 때가 오면 여전히 저의 상태는 그때와 비슷해집니다. 다만, 그럴 때마다 그날, 친구와의 대화가 생각이 나요. 냉소적인 바다 앞에서 담담하지만 따뜻했던 친구의 목소리가요. 그때 그 친구의 마음이 잠깐이나마 나를 숨 쉬게 하는 것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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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