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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Oct 14. 2021

아빠를 사랑하는 아이

네가 여자 아이든 남자 아이든 상관없어

너도 언젠가는 ‘난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라는 말을 하는 날이 올까(꼭 여자 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라도 그런 말은 할 수 있잖니?).


네가 커서 사랑이란 걸 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하긴 그렇지 까마득한 이후의 일일 테니까(과연?)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이성에 대한 관심도 빠른 편이라고 하니까. 너는 어떨지 모르겠다. 


내가 어릴 때는 남녀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게 금기시되었어(어디 멀리 있는 다른 행성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줘). 남녀 칠 세 부동석이란 말을 네가 태어난 후에도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지금도 사실 잘 쓰는 말은 아니다) 우리 때는 그게 아주 흔한 말이었지. 어른들은 남녀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그 안에 그들에게 적합한 역할을 심어준 후 그게 섞이거나 혼동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남자는 남자아이답게, 여자는 여자 아이답게. 그래야 칭찬받았고 그게 정상적인 거였어.


아마 너는 이해하기 힘들겠지. 남녀를 그런 식으로 구분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나와 J는 너에게 성역할에 구애받는 삶의 방식을 물려줄 생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게 당연한 시대도 있었다. 시대마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일정 존재해. 중요한 건 그런 걸 인지하고 변화시키려는 의지다. 그 의지들로 인해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좋을 것 같아.


사랑이란 건 ‘숨’을 불어넣는 것과도 같다고 하지. 그리스 신화 중에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 중 죽음의 잠에 빠진 프시케를 큐피드가 진정한 사랑의 키스로 깨우는 장면이 있다. 키스란 숨을 불어넣는 행위와도 비슷하지. 간혹 로맨스 드라마에서도 나오거든. 썸을 타는 주인공 남녀가 위기의 순간 인공호흡을 하며 숨을 나누는 장면이. 로맨틱하면서도 극적인 효과를 주는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숨을 불어넣는 건 생명을 얻는 것, 지키는 것과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어. 그것과 사랑을 동일시할 수도 있다는 거야. 좀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모든 인생이 드라마나 영화 같을 순 없거든) 어쨌든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조금 어렵다. 나는 J를 무척 사랑하지만 그 감정이 불꽃처럼 막 활활 타오르는 그런 종류는 아니었거든. 조금씩 알게 모르게 불이 붙어서 어느 순간 아주 오래도록 타는 숯이 되어 있는 그런 마음이었달까. 사랑을 표현한 이후에 처음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마음이 더욱 깊어지기도 했다. 사람마다 사랑을 느끼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차차 네가 알아가면 좋겠어.


그리고 사랑에는 순위를 매기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도. 그러니 네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에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며 고민한다고 해도 서운해하지 않을게. 또한 너도 아빠가 좋아? 내가 좋아?라는 너의 질문에 내가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이며 고민한다고 해도 서운해할 필요는 없어. 무엇보다 너에 대한 사랑과 J에 대한 사랑은 이루고 싶은 욕구 자체가 다르거든. 


어쨌든 이성에 대한 사랑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 제쳐두더라도 나는 네가 나만큼 J를 사랑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아니, 그 이상이어도 괜찮다.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아,라고 하면 당시에는 조금 서운할 수 있겠지만 괜찮아. 나도 너보다 J가 더 좋을 수도 있잖니.


사실 나는 나의 아빠, 그러니까 너의 할아버지를 좋아하지 못했어. 아니,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다. 이런 얘기가 너를 슬프게 할 수도 있겠지. 부모 자식 간에는 어쩔 수 없는 사랑과 애정이 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미움과 골도 존재한다는 걸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인간관계라는 건 좀 복잡하잖니. 가족이라고, 피를 나눴다고 해서 무조건 사랑할 수는 없다는 걸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거야(물론 우리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책이나 다양한 미디어를 통한 간접체험으로만 이해한다면 좋겠다).


나의 아빠는 뭐랄까, 가정에 충실한 사람은 아니었다. 돈을 벌어도 집에는 생활비를 제때 가져다주는 가장은 아니었어. 그래서 나는 항상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어. 아니,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부모님은 평생을 열심히 일하셨지만 이상하게도 형편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거든. 그러면서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가기만 했지. 


그런 와중에 다정한 아빠도 아니었어. 부모님은 돈 문제로 항상 큰 소리를 내며 싸웠고 물건을 집어던졌고 누군가는 울었지. 나는 어린아이였으니까 항상 울지 않는 쪽을 나쁘다고 생각했다. 소리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사실 좋은 사람은 아니잖니, 이유야 어쨌든).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자라면서도 좀처럼 아빠가 좋아지지 않았어. 그저 단순히 나를 낳아준 사람이라는 이유로 존경심이 생기거나 애정이 생기는 일도 없었다. 내가 좀 이상한 사람인지도 몰라. 하지만 인간관계라는 건 혈연이라고 해서 어떤 예외가 생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이라도 노력해야 해.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그런데 나의 아빠는 그런 노력 없이 그저 가장이라는 이유로 존경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지. 본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그래서인지 나는 아빠와는 정반대인 사람과 결혼했어. J는 크게 소리를 지르는 법도 없고(가끔 노래는 부르기도 하지만) 물건을 집어던지지도 않는다(물건을 소리 나게 놓거나 문을 쾅 닫는 법도 없지). 사실 나는 J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을 딱 3번 봤어. 그마저도 그는 나에게 화를 표현하지 않고 꾹 참더라. 그런 후 조심스럽게 화가 난 이유를 설명하지. 처음 보는 굳은 표정 그리고 침묵. 그것만으로도 아주 많이 화가 났다는 걸 표현할 수 있는 신기한 사람이야.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네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우리의 연애사일 테니 넘어가고 세 번째로 화를 냈던 것은 너와도 관련이 있으니 말해볼게. 


임신 초기였어. 입덧으로 한참 고생을 하고 있었지. 정말이지, 입덧이란 게 그렇게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거란 걸 왜 아무도 얘기해주질 않은 걸까. 다들 일부러 말을 해주지 않는 건가, 나만 당할 수 없으니까? 말한다고 해서 달리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누군가는 충분히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몸상태가 좋은 날이 있었어. 아침에 일어나면 시작되는 멀미와 같은 울렁거림 메슥거림이 덜하거나 없는 날이. 그날은 그런 날이었고 입덧이 심해서 퇴사를 하게 된 이후 재택근무하던 작은 방을 정리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던 나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당장 일을 시작하고 끝내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주 고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나이기에 그날도 그냥 본성을 따른 것뿐이야.


일단 거실에 있는 커다란 컴퓨터 책상을 작은 방으로 옮겨야 했다(우리는 거실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었거든). 가로*세로 75*150짜리 책상을 번쩍 들 수는 없으니까 질질 끌면서 자고 있는 J가 깨지 않게 살금살금 움직였지. 하지만 책상은 너무 크고 작은 방의 방문은 너무 작았어. 책상을 눕혀서 어찌어찌 방으로 들어가긴 했는데 눕힌 책상을 다시 세우려니 힘이 부족하지 뭐니.


입덧 때문에 잘 먹지 못해서 몸무게가 쑥쑥 빠지던 시절이었고 일어서면 어지러워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책상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겠니. 한참을 끙끙대는데 J가 일어나버렸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대번에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걸 알아챘다. 그는 평소에 절대 그런 표정을 내게 보이지 않거든. 내가 하고 있는 양을 보고 대강 상황을 파악한 J가 처음 한 말은 "나를 깨웠어야지!"였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탓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에 안심했어. J는 항상 그랬어. 내가 하는 일 자체를 탓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법이 없었거든. 다만 혼자 하기 힘든 일을 혼자 하려고 할 때는 종종 나를 타일렀다. 하지만 그날은 타이르는  것 이상의 말투였지. 나는 아주 오랜만에 부모님한테 혼이 나는 어린아이처럼 J의 눈치를 보며 그의 심기를 더는 거스르지 않도록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서 J는 나에게 부탁을 하기 시작했어.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그는 나에게 부탁을 하더라. 제발 이런 일은 혼자 하지 말라고. 무엇이든 말을 하면 해줄 테니 자기한테 말을 하라고. 음, 말하다 보니 화를 냈다고 하는 게 맞을까 의심이 들긴 하지만. 나는 수긍했어. 그의 그런 심각한 표정은 처음 봤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위한다는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졌지. 사실 물건들을 옮기면서 어느 정도 J가 이 꼴을 보면 혼나겠구나, 하는 예감을 하고 있기도 했다(그래도 하고 싶은 건 하고야 마는 게 나란 인간이지;;).


너의 아빠가 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니? 너는 아주 운이 좋은 아이라고 생각해. 나를 엄마로 만난 것은 두고 봐야 할 일이겠지만 J를 아빠로 만난 것은 말이야. 내가 J를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야.


어릴 때 나는 아빠와 사이가 좋은 다른 친구들이 부러우면서도 나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어. 나는 이미 너무 어긋나고 비뚤어졌거든. 나의 어린 시절과 사춘기, 어른이 되어서도 이 감정의 골은 조금의 메워짐 없이 깊어지기만 했어. 중간중간 어떻게든 메워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지. 아빠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 아니면 내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거나. 둘 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도 알게 되겠지만 사람이 변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거든.


네가 J를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은 이루지 못한 나의 바람일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이런 결핍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가면 좋겠다는 나의 작은 바람. 무엇이든 나보다는 좋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이기적이면서도 어려운 바람. 너는 그런 작은 바람들을 부담스럽거나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바람이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J를, 너의 아빠를 사랑하길 바라는 이 바람만은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해.


네가 태어나서 만나게 될 너의 아빠는 정말,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사람이거든. 혹시나 싶어 말하지만 사이좋게 지내는 건 괜찮다만 잊지 말아야 해. J는 이미 나와 결혼해서 너와는 결혼할 수가 없단다.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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