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을 거스르는 여자의 이야기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잘못 읽히기 쉬운 책입니다.
대다수의 독자들은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는 이유를 '어릴적 키우던 개의 죽음과 아버지의 가정폭력' 때문이라고 판단하지만, 이 단서만으로는 결말에 스스로 나무가 되고자 단식을 하며 죽어가는 영혜의 행동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죠. 그렇다면 영혜는 왜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 것일까요.
* 에곤 쉴레의 '네 그루의 나무들'
책의 표지엔 앙상한 나무를 둘러싼 비틀린 나무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책의 주제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작중 영혜를 둘러싼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소설은 연작 형식으로 3부작으로 나뉘는데요. 각 파트별로 화자가 바뀌며 영혜와 직접적으로 얽히는 그들이 겪는 감정, 생각들이 여과없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1부의 화자인 남편은 영혜의 갑작스러운 채식선언을 '비정상적인' 행위로 보고 이혼을 함으로써 그녀를 버립니다.
그녀의 형부도 마찬가지로 영혜의 몸, 그 중에서도 그녀의 등에 남아있는 몽고반점- 유아기의 상징이자 성인이 되면 사라지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예술적 호기심과 성적 욕망만을 품을 뿐, 영혜를 이해했다고는 말하기 힘든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몽고반점은 무엇을 뜻하길래 형부는 영혜를 자신의 작품 속 뮤즈로 택했을까요.
몽고반점은 원초적 순수함, 인간이 태어날 적부터 지니고 있었던 순진함, 무색의 원시성을 뜻합니다.
유아들은 자기중심적이되 그 방향이 타인을 해치거나 사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죠.
작품속에서 몽고반점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과 영혜가 보인 비이성적이면서도 강렬한 모습 (모두의 앞에서 자해를 하던 장면)을 본 형부는 그녀에게 인간적인 호기심과 동시에 긴장감을 느꼈을 겁니다.
그는 영혜에게 느끼는 이성적 감정을 예술적 호기심으로 포장해 그녀에게 접근하죠. 또한 3부 '나무불꽃'에서 주요 소재가 되는 '식물성'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3부의 화자인 인혜는 동생 영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인혜에게 있어 영혜는 '끝까지 돌보고 보살펴야 할 가엾은 동생', '책임감의 대상'이었습니다. 비록 영혜가 자신의 남편과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 삶을 망쳐놓았고, 곁에 두기 싫어 병동에 입원시켰지만 그럼에도 인혜는 영혜를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를 위해 과일과 채소만으로 도시락을 싸고, 꾸준히 면회를 와 주는 사람은 인혜뿐이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내면이 뒤틀려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이를 표지 그림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앙상한 나무를 둘러싼 세 그루의 나무가 이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정상적인 것처럼 보여도 세 그루의 나무가 풍기는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것처럼, 영혜를 둘러싼 세 사람도 각자의일상을 영위하지만 알게 모르게 뒤틀려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구체적인 경위와 양상은 다르지만 영혜를 '비정상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것처럼, 표지 그림에서도 앙상한 나무, 잎사귀가 얼마 남지 않은 나무의 주위에 늘어선 세 그루의 나무는 위협적으로 보이기까지 하죠. 이들의 가운데 자리잡은 앙상한 나무는 주위 나무들과 비교해 초라해 보입니다. 연약하고 금방이라도 시들어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 나무는 영혜를 닮아있죠.
작중 한 번도 화자로 등장한 적이 없는 영혜, 몰이해와 냉대, 무관심으로 메말라가다 마침내는 스스로 나무가 되어보이겠다며 일체의 음식을 끊고 서서히 죽어가는 영혜를 연상시키는 이 나무는 결말에 영혜가 더는 살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 '채식주의자'는 적합한 표현인가?
1부에선 영혜의 남편이, 2부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가, 3부 '나무불꽃'에선 그녀의 언니가 화자로 등장해 영혜의 행동을 서술할 뿐인 이 소설에서 영혜는 주인공이면서도 이방인이라는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이는 작가가 의도한 부분으로, '영혜'라는 인물에게 텍스트에 온전히 스며들지 못하고, 작중 주인공이면서도 겉도는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독자들이 영혜에게 몰입하도록 한 것이죠. 그러나 관찰자적 시점에서 머물를 수 밖에 없어 독자들은 영혜라는 인물을 이해하면서도 제3자로 바라보게 됩니다.
따라서 책의 제목인 '채식주의자'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영혜의 입장에서는 채식을 선호해서 채식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육류를 거부한다'는 해석이 더 정확하니까요. 독자들은 그녀를 '채식주의자'로서 바라보고 해석하지만 영혜가 육식, 더 나아가 다른 생명체의 살점을 뜯어먹는 것을 혐오한다는 걸 고려해보면 '육식거부자' 혹은 '비폭력주의자'라는 해석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 인간의 본능을 경계하고 인간을 벗어난다는 것 *
그러나 채식을 고집한 댓가는 가혹했습니다. 병동에 보내지고, 아사하기 직전까지 내몰리고 작중에선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문구들이 자주 보입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동물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굉장히 의미심장한 부분으로, 포유류,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후로- 인류가 육류를 익혀 먹고, 고기를 섭취해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영혜의 행동은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니까요.
인간의 폭력성,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점을 영혜는 혐오했고, 이를 경계하고자 했습니다. 육류를 먹지 않는다면 남은 선택지는 채식밖에 없죠. 영혜를 '채식주의자'로 부른다는 통상적인 사실은 어쩌면 우리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생각이나 주장을 '주의'라는 접미사를 붙여 쉽게 이해하고자 하는 습성일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해치고 싶지 않아 인류의 기원, 뿌리를 거슬러 나무가 되고싶어하는 순결한 존재가 닿을 수 있는 건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