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그 속에 담긴 두 번째 이야기들
언제부터 였을까 '창문' (창문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
골목길도, 창문도, 의자도. 하나씩 관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 계기는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나의 빠른 걸음 때문이었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마지막 장을 읽고 난 뒤, 어떤 내용들을 봤는지 순간적으로 잊을 때가 있는데 내 걸음이 이와 많이 닮았었다. '책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읽는 것'이 목적이 되어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과 '주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 이로 인해 길 양옆에 자리 잡은 것들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늦기 전에 천천히 걷는 연습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느 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창문'이었다.
처음엔 쉽지 않았다. '천천히 걷자'라는 의식적인 행동이 '빠르게 걷기'라는, 이미 몸에 진하게 배어 있는 습관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하다 마침내 나는 길을 걸으며 좌, 우를 살펴보는 방법 대신 아예 보고자 하는 대상과 마주하는 것이 걸음을 늦추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한 번, 두 번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존재들을 함께 바라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창문'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바라 보기'라는 일방향을 언제나 '마주 하기'라는 쌍방향으로 바꿔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바라봐 주었다는 고마움 때문이었을까,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놓치는 것들을 내게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머무르며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의자,
한쪽만 보기엔 아쉬울 거라며 반대편을 비춰주는 여러 개의 창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봄의 손길까지
지난 가을, 군산 여행의 이튿날. 나와 친구는 한일옥에서 뭇국과 모주를 먹고 마신 후 전날 걸었던 길을 다시 한 번 걷고 있었다. 익숙하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들을 천천히 살펴보다 전날에는 보지 못했던 카페에 다다랐는데, 창문에 비친 모습이 참 재미있었다. 가장 먼저 나의 눈높이와 같은 창의 중앙을 통해 반대편 거리와 카페 안쪽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과 위쪽을 통해 가을 하늘도, 세워진 차량도, 카페 주인의 모습도 차례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의 창으로 봤다면, 흘려보낼 수도 있었던 모습들. 이렇듯 창문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을 잘게 쪼개어 그 곳에 담긴 모습과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큰, 하나의 창으로 이뤄져 있었다면 지나쳤을 모습들.
군산에서 마주한 아홉 개의 창과 아홉 개의 풍경
열차이야기(언제부터 였을까 '열차')를 통해서도 고백했지만, 어릴 적부터 나는 열차를 많이 좋아했다. 특히 열차 안에서도 객차와 객차를 연결해주는 공간을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는 문에 달린 작은 창 때문이다. 반대편 발판에 앉아 보면 가지각색의 하늘을 볼 수 있고, 가만히 서서 보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잡아볼 수 있는 곳. 물론, 자동차와 버스에서도 멈춰진 모습이 아니라 쉴 새 없이 바뀌는 모습들을 각자의 창을 통해 바라볼 수 있지만, 열차 안 정해진 크기를 통해 바라보는 모습만큼 매력적이진 않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모두 담을 수 없다는 걸 안다는 듯
봐야 할 것만 콕 집어,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작은 창
얼마 전, 회사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액자 속 빛에 반사된 또 다른 창을 보았다. 가끔은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주기도 하는 창문과 앞으로도 더 많은 만남을 갖고 싶다. 그리고 더 많이, 마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