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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숲 Aug 13. 2020

완전한 휴식

온전한 나로 돌아가는 시간

일을 잘하는 것만큼이나 잘 쉬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는 어느 라이프 코치의 블로그 포스팅을 봤다. ‘잘 쉰다는 건 어떤 건가요?’라는 댓글이 눈에 띄었다.  그 댓글에 라이프 코치는 이런 답글을 달았다.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가져보세요.”


그때 알았다. 피아니스트도 아닌데 매일 피아노를 치던 시절이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도 아닌데 매일 그림을 그리던 때도 있었다. 손가락이 굳어 잘 되지도 않는 피아노를 얼마나 열심히 오래 쳤는지 다음 날이면 손가락과 손목이 이어지는 근육이 아플 정도였다. 아이펜슬을 잡은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을 정도로 그림을 그리던 때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지나고 보니 그게 다 나만의 완전한 휴식이었다.


내가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은 큰 딸이 여섯 살 때 디지털 피아노를 집에 들이면서부터니까 10년 전부터다. 이젠 손가락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을 아끼느라 다시 피아노에서 손을 뗐지만, 한동안 피아노에 정신이 팔렸을 땐 오다가다 한 번씩 앉아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대체로 피아노 뚜껑을 열어놓고, 전원도 켜 두곤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몇 시간을 칠 때도 있었다. 주로 어렵지 않은 클래식 곡 위주로 쳤는데 그러다 보면 유독 마음이 가는 곡이 있었다. 그래서 작곡가가 누구지? 하고 보면 ‘아! 역시 쇼팽이었어!”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알게 됐다. 내가 쇼팽을, 아니 쇼팽의 곡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렇다고 내가 쇼팽에 대해 잘 안다거나, 쇼팽의 곡을 기가 막히게 연주한다거나,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그냥 피아노를 치는 게 좋고, 한 곡 한 곡 완성해 가는 재미가 솔솔 했을 뿐. 누구를 위해서도, 누구에 의해서도 아닌, 그냥 그 행위 자체가 즐거웠다.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아이패드와 아이펜슬, 그리고 어플 하나면 못 그릴 게 없는 세상. 한동안 나는 거의 매일 밤 영양제를 복용하듯, 자기 전 한두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고맙게도 유튜브 세상에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공짜로 공유해 주는 수많은 유튜버들이 있다. 덕분에 나는 마음에 드는 그림체의 유튜버 영상을 골라 열심히 따라 그리며 어플의 기능을 익혔다.


디지털 드로잉의 가장 큰 매력은 어플의 기능을 백분 활용하면 좀 더 쉽게 그럴싸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억울하겠다 싶을 만큼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잘 그릴 수 있다. 그렇게 완성한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공유하고 도움을 받은 유튜버를 해시태그 했다. 한 번은 그 유튜버가 내 게시물에 댓글을 달아줘서 엄청 들뜨고 감사했던 기억이 있다. 그림 역시 그 행위 자체가 재밌었다.


“이토록 온전히 나를 위해 뭔가에 몰입을 해본 적이 언제였더라?”


생각해 보면 까마득하다. 어릴 때? 아주아주 어렸을 때는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이미 내 기억에서 사라진 그때를 아이들을 통해 가늠해 봤다.


아이들을 보면 한 번쯤 한 가지에 몰입하는 시기가 있다. 큰 애의 경우 그림에 빠져 눈만 뜨면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작은 애는 종이 오리기에 빠져 서서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걸어 다니면서도 색종이를 오려대곤 했다. 처음엔 그런 아이를 보며 ‘화가가 되려나?’ ‘종이 공예가가 되려나?’ 등등의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홀린 듯 그리고, 오렸다. 왜 하필 그림이고 오리기냐의 의미 따위는 필요 없다. 그냥 그 행위 자체가 재밌으면 끝. 그야말로 무아지경이다.  


그렇다면 ‘본업을 좀 그렇게 해보시지?’ 그러게...  본업을 그렇게 했더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미 내 이름 석자를 알고도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취미를 본업으로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글쎄.... 그럴지도. 하지만 나에겐 본업과 취미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다. 바로 ‘의미’다.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나에게 본업은 재미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고, 늘 목마르고, 그 분야에서 잘하는 사람을 보면 질투가 난다. 그래서 좌절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성취감도 크다.

반면 취미는 오직 재미다. 특별히 잘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애쓰거나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나에게 취미는 그런 거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는 말한다. “즐기는 사람은 못 이긴다는데, 취미를 좀 더 파보는 건 어때요?” 하긴, 취미가 본업이 되는 사람도 많고, 관심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꾸준히 글을 공유하다가 책을 출간하는 사람도 있다. 취미로 제2의 인생을 여는 사람도 종종 봤다.


나라고 못할쏘냐 싶지만, 지금 딱 이 정도가 나는 좋다. 욕심 없이 재밌게, 더 많은 에너지를 쓰기보단 마냥 재밌게 하고 싶다. 언젠가 재미에 의미가 더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나에게 취미는 목표도 꿈도 아닌, 그저 순수한 내면의식으로 몰입하게 만들어주는 ‘명상’과 같다. 온전한 나로 돌아가는 가장 나다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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