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렁슬렁 일상의 여유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제주에서 유명한 커피라며 원두를 보내왔다. 택배 상자를 열자마자 커피 향이 코에 확 끼쳤다.
“아~ 좋다!”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베개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 큰 대용량 원두였다. 그 큰걸 하나도 아니고 두 봉지씩이나 보내다니, 고마워 친구! 덕분에 커피 핸드드립 도구들을 오랜만에 꺼냈다.
한동안 커피에 진심이던 시절이 있었다. 수동식 그라인더에 커피콩을 넣고 드르륵드르륵 갈면 야생의 커피 향이 난다. 드립퍼에 종이 필터를 걸고 거칠게 간 원두가루를 탈탈 털어 넣는다. 뾰족하고 긴 주둥이가 날렵한 핸드드립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졸졸졸 부어주면 원두가루가 빵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부드러운 커피 향이 그윽하게 퍼진다.
또로록 또로록 유리 주전자로 떨어지는 커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또 그렇게 좋다. 불멍 아닌 커멍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커피 한 잔 할까?’ 싶어서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각종 도구들을 꺼내서 커피 한 잔을 마시기까지 족히 10분은 걸린다. 그 모든 과정을 의식처럼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슬슬 번거롭고 귀찮아졌다. 바쁜데 한가롭게 커피 의식이나 치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결국 에스프레소 머신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핸드드립 도구들은 수납장 깊숙한 곳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찾지 않았다.
똑똑똑...
오랜만에 커멍을 하면서 그동안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생각해 봤다. 얼마나 바빴길래 좋아하는 커피를 위해 하루 10분도 시간을 내지 못했을까? 그런데 정작 바빴던 건 내 마음이었다. 시간이 없었던 게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았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이대로 나이만 먹을 순 없어!”
“반드시 뭔가를 해야만 해!”
몹시 비장했었다. 비장하면 할수록 마음은 점점 더 바빠졌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행동이 따라줘야 하는데 마음만 혼자 앞서도 너무 앞서 간 것이었다. 뭐든 손발이 맞아야 하거늘. 그래서 요즘은 마음의 힘을 풀고 행동이 따라올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다.
스몰 스텝!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천천히 행동하면서 마음과의 거리를 조금씩 좁히는 중이다. 비로소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기는가 싶었는데, 때마침 친구가 커피 원두를 보내왔다. 센스쟁이 내 친구 덕분에 커피 한 잔의 여유까지 되찾았다.
정성과 공을 들여 마시는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쉽게 내리는 캡슐 커피와는 분명 다른 맛과 향이 난다. 그렇다고 둘 중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다의 얘기가 아니다. 커피의 맛에는 그날의 분위기, 기분, 상황이 녹아있으므로 취향도 그때그때 달라진다. 그래서 핸드드립 도구들을 에스프레소 머신 옆에 꺼내 뒀다. 언제든 골라 마실 수 있게 말이다.
이젠 핸드드립 커피뿐 아니라 모카포트도 하나 들였다. 모카포트에서 진하고 뿜어져 올라오는 에스프레소의 향기가 온 집안에 묵직하게 퍼진다. 캡슐머신으로 간단하게 마실 수도 있지만 굳이 번거롭게 일을 벌인다. 기분 좋은 불편함. 이런 게 바로 로망일 테니. 전에 없던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 봐야 고작 10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어때요, 커피 한 잔 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