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외쿡인 노동자의 노마딩 이야기
원래 잔병치레가 잘 없는 편인데 감기 몸살 같은게 걸려서 만 하루를 꼬박 앓았다. 정말 어쩌다 한번 30시간 정도 아팠던건데 아픈 타이밍이 절묘해서 2년에 걸쳐 앓았다 (...)
2017년의 마지막을 골골대면서 보내고, 새해를 얌전히 집에서 담요 둘둘 덮고 맞이하였고, 새해 첫날에도 골골대다 간신히 정신차려보니 해가 져물어 가고 있다. 그 와중에 집에서 골골대다 '힐빌리의 노래' 도 완독했고, 머릿속 생각을 정리했다.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내가 어떤 나라에 살기 좋아하는지 명확해졌다. 나는 안전함, 치안을 굉장히 중시여기고, 깨끗하고, 국민들이 (대체적으로) 예의바른 나라, 매너가 있는 나라를 선호한다. 그 와중에 대도시여야하고, 다양한 인프라가 빵빵하게 갖춰져 있어야하며 편리한 대중교통 시스템이 있어서 자동차를 보유하지 않아도 되는 곳을 선호한다. 그리고 동양 문화권이면 더 좋고, 영어가 통하면 더 좋다. 여기에 날씨가 좋으면 금상첨화. 일정 위도 위로는 해가 짧고 추워서 북유럽은 아마 내가 못 살꺼다. (이건 알래스카 여행으로부터의 경험)
일단 안전/치안에서 정말 대부분의 나라/도시가 탈락한다. 사실 미국도 이 기준에서 내가 살고 싶어하는 도시 세 곳 모두 꽤나 간당간당한 마지노선에 위치한다. 다르게 얘기하면, 꼭 살고 싶은 곳은 아닌 축에 속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치안에 물가는...)
안전/치안 기준에 내가 가본 나라들 중에 충족하는 나라는 한국, 일본, 싱가폴이다. 안전하고 깨끗하다. 내가 밤에 혼자 노래들으면서 카톡하고 다닐 수 있다.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덜 걱정 할 수 있다.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고 커리어 잡고 일하는 쪽으로만 생각하면 한국/일본보다 싱가폴이 꽤 우위에 서지 싶다.
일본에서는 나하 (오키나와), 오사카, 도쿄, 삿포로 정도가 가본 도시인데 일단 도쿄는 본토라 제외. 오사카는 내가 정말 좋아하나 역시나 본토라 제외하면 삿포로와 오키나와가 남는다. 한국에서는 아직 서울 이외에는 살아보지 않았고, 싱가폴은 나라가 도시.
여기까지가 '살고 싶은' 곳이라면 그 중에서 '살 수 있는' 도시가 어디가 있을까. '살 수 있으려면' 내가 직장을 잡아서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면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커리어 상으로의 내 미래를 (현격하게) 희생해서는 안 된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의 quality of life 에 최대한 가깝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원격근무를 하지 않는 이상 여기서 삿포로와 오키나와가 탈락하게 된다. 사실 크게 찾아보지 않은 면도 있지만, IT 산업이 발전한 도시 top 20 에 들거나 인구/경제력 등에서 top 20 정도에 들어오는 도시, 혹은 그 나라에서 가장 IT 가 발전한 도시가 아닌 이상 내가 지금의 quality of life 에 근접 할 수 있는 수입과 지속가능한 커리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직장이 없지 싶다. 일본 진짜 살아보고 싶은데 도쿄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갈 수 있는 도시가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다시 미국이 등장한다. 안전/치안이 굉장히 간당간당해서 짜증이 나지만 대도시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며 quality of life 를 지금 수준으로 가져갈 수 있는 도시들이 있다. 샌프란시스코를 포함한 Bay Area, 뉴욕, 씨애틀 이렇게 세 곳.
이렇게 이야기하는 세 나라의 도시들이 나에게 '살 수 있게' 된 이유는 다 비슷하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내가 IT 업종에서 괜찮은 직장을 얻어서 일하면서 살 가능성이 높은 곳. 한국은 내가 씨티즌이니 비자 문제 없고 적응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나랑 잘 맞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큰 관건이다. 미국은 현재 영주권자이니 비자 문제 없고 적응은 평생해도 안 될 것 같고 -_-;; 좋은 직장들이 있다. 싱가폴은 비자 문제가 있으나 잡 오퍼만 받을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비자문제가 해결되는 나라.
여기에서 미래까지 고민을 하다보면 고려할 것이 더 많아지는데, 이제 당장 2년만 살 곳을 구해 볼 기회가 생겼다. 그 기회가 뭐냐면 re-entry permit 의 발급이다. 원래는 다른 용도로 발급 받았지만, 나에게 2년의 실험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re-entry permit 은 미국 영주권자가 미국 이외의 곳에 승인 받은 기간동안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준다. 한번에 180일 이상 미국 본토를 떠날 때 신고를 해야 할 필요가 사라진다. 내 경우 2년짜리를 발급 받았고, 내가 그동안 미국에 가지고 있던 금융 자산 같은 것을 일부러 싹 정리하지 않는 이상 2년 뒤까지는 영주권자의 신분을 유지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보험인 "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되돌릴 수 있음" 이 생긴 셈.
전현무씨의 강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mQpj35ZG4w
(총 7분짜리 영상이고, 이야기는 2분에서 시작)
요약 캡쳐본: https://www.facebook.com/bot.goodwriting/posts/645293555578466
그래서 다시 고민 시작이다. 내가 과연 실리콘밸리의 이름 있는 회사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고민이고, 어디서 무엇을 알차게 해보면 내가 제일 재밌을까 고민이다. 그리고 백업 플랜은 결국(?) 미국에 돌아오는것이라 이 2년을 미국에서 안 보낼 수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미국에 있어도 좋지만 이번에는 정말 "삶"에 대한 실험이기에.)
앞으로의 2년간 남은 가능성을 정리하면
a. 싱가폴에서 구직해서 산다.
b. 서울에서 구직해서 산다.
c. 서울에서 원격근무가 가능한 직장을 구해서 일본이랑 서울을 오가면서 산다. (일본에서 직장을 구해서 비자가 있는게 아니라면 일본에서의 장기 체류는 불가능하다.)
d. 미국에서 산다.
(원래는 유럽에서 살아볼까? 도 고민했었어서 런던은 빼고, IT 산업이 있는 베를린과 암스테르담도 생각했었다.)
정도가 된다. 사실 한국에서 살면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엔지니어로서의 하드스킬에 언어/문화/인간관계적인 소프트스킬을 얹어서 쓰면 과연 지금이랑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에 대한 실험을 하고 싶은 것이 크고 (미국에서의 소심쟁이 IC 에서 조금 더 조직 전체의 분위기, 문화, 업무 방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influencer 로), 싱가폴은 한 2년 살면서 일 할 수 있으면 동남아를 정ㅋ벅ㅋ 하고 올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도 있다. 무엇보다 싱가폴은 굉장히 끌리는, 해보고 싶은 비엔지니어링 포지션이 있는 것도 크고.
언제나 붙기 전에는 선택권이 없기에, 결국 하나씩 진행을 해보지 싶은데 스스로를 열심히 push 해야한다. 이런 고민도 꽤 오래 했는데 슬슬 추려져서 시도가 남았다. 부디 열심히 시도해서 좋은 선택을 해서 또 더 재밌는 삶을 앞에 펼쳐 볼 수 있길.
미국에서의 영주권자 신분을 유지하면서 외국에서 소득을 올리면, 지금 내는 어마어마한 세율을 거의 대부분 적용 받는다. 한국이나 싱가폴에서 돈 벌면서 미국 세율로 세금을 내야하지 싶은데 이런 국가 경계를 넘는 세금에 대해서는 누구한테 상담을 받아야 할까요. 혹시나 아시는 분 있으면 알려주세요 (...) 미국 영주권자로 한국에서 일하면 어떻게 세금을 내는지, 한국 시민 & 미국 영주권자로 싱가폴에서 일하면 어떻게 세금을 내는지.
올 한해도 익싸이팅하고 다이나믹하게 고고!! 제 일기장 같은 브런치를 구독해주시는 독자분들 모두 늘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지혜와 용기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Happy New Yea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