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내한 콘서트 관람기
아침에 눈을 뜨니 사방이 고요하다.
시계를 보니 6시가 조금 지났다. 지난밤은 종종 날 힘들게 하는 불면의 밤이 아니었고,
새벽녘에 일어나 쓸데없이 서성인 것도 아니라 오랜만에 몸이 개운하다.
어제는 요가를 했기에 러닝은 하지 않았다. 일어난 김에 잠깐 헬스장으로 내려가 뛰고 올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난 좀 망설인다. 사실 오늘 저녁, 나에겐 좀 부담스러운 일정이 있다.
우리 막내가 좋아하는 일본 가수 Eve의 콘서트.
공연 시작은 저녁 6시고, 공연장의 위치는 집에서 두 시간 거리는 되니 꽤 먼 거리다.
아이와 함께 움직이니 차를 가지고 가는 게 편하겠지만, 마침 여의도에서 불꽃쇼가
열리는 날이라 교통 체증이 확실히 예상되는 주말 저녁이다. 어떻게든 대중교통으로 움직여야 하고
아이와 함께 콘서트까지 즐겨야 한다! 즐기긴 즐겨야 하는데, 이브라니... 나에게 친숙한 가수도 아니고
노래도 사실 내 취향은 아니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기대감이란 게 커지지 않는다.
어제 공연 관람 D-1이라는 알림톡을 받고 난 읊조렸다.
이 놈의 이브, 드디어 공연을 하시네. 나도 거길 가게 생겼네.
5월에도 한번 내한 공연이 있었다. 아이는 티켓팅을 하려고 무진장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실패했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 유명한, 아니 대중적인 가수는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나 티켓팅 경쟁이 치열하다니
난 좀 의아했다. 여기저기 물어보니 원래 티켓팅이 그렇단다. 그리고 지난 8월 다시 또 내한 공연 티켓팅이
시작됐고, 난 티켓팅 자체가 그렇게 어렵다는데 설마 될까 싶어 스탠딩 자리는 절대 안 되고, 지정적으로 엄마랑 함께 볼 수 있게 두 자리 표를 사면 한 번... 하고 말꼬리를 흐렸는데, 이 녀석이 몇 주에 걸쳐 샀다가 버려지는 표를 계속 추적해 결국 지정석으로 두 자리를 확보한 것이다. 무려 티켓 한 장 가격이 121,000원.
아이는 온갖 애교로 아빠를 구슬려 결국 티켓값 24만 원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 큰 애는 자기한텐 절대 불허한 콘서트 관람이 왜 동생에겐 가능하냐며 가자미 눈을 뜬다. 그런 일이 있긴 했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땐 또 그게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데... 심지어 이브 콘서트 이틀 후엔 막내의 생애 첫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이럴 땐 생각이라는 걸 그만해야 한다. 어쨌든 내가 오늘 이 부담스러운 일정을 소화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체력이다. 부담스럽다고, 마음 복잡하다고 누워있는 거보다는 뛸 수 있을 때 뛰어놓는 게 옳다. 몸이라는 게 쉬면서 채워지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한 2년 운동을 하며 느낀 건 그래도 운동만큼 확실한 '채우기'는 없다는 거다. 자동차도 안 타고 세워두면 고장이 나고, 집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토요일 아침 헬스장엔 사람이 제법 있는 편이다. 평일 낮엔 여성이 다수지만, 주말이나 휴일엔 남성도 꽤 섞여있다. 2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러닝머신에도 이미 여러 명이 달리고 있다. 경험 상 텅 빈 헬스장에서 혼자 뛰는 것보다 함께 뛰는 게 더 효과적이다. 아주 딱 그만 뛰고 싶다가도 옆에서 신나게 뛰면 왠지 모를 경쟁심이 발동해 계속 뛸 수 있는 것이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요사스러운 구석이 있다. 워밍업으로 잠깐 걷다가 바로 뛰기 시작한다. 내 양 옆의 남성분도 뛰었고, 여성분도 간헐적으로 뛰었지만, 내가 제일 강렬하게 멈추지 않고 달렸다. 솔직히 콧대가 좀 올라가는 기분이랄까? 그러니까... 오래전 뛰는 건 엄두도 못 내고,
그저 걷기만 하던 내 옆 러닝머신 위에 지금의 나처럼 달리던 젊은 여성이 있었다. 난 그녀를 경외심을 갖고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뛸 수가 있나? 그녀의 달리기는 나비처럼 가벼웠다. 그런데... 지금 나도 그런 거 같다. 쿵쿵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없다. 나는 속삭이듯 달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달려야 오래 달릴 수 있다. 달리면서 깨달은 거다. 그래서 그 젊은 여성도 나비처럼 달린 것이다. 달린 거리 3킬로가 지나며 왠지 그냥 딱 그만 달리고 싶기도 했지만, 아직 힘이 남아 있고 그냥 잠깐 지루해진 것뿐이다. 달리기 싫다는 생각을 지우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옆에 달리는 사람들의 숨소리도 들어보며 시간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1킬로를 채우니 이제 1킬로만 달리면 5킬로 루틴이 완성된다. 부담이 사라지고 마음이 즐거워진다. 마지막 1킬로는 즐겁게 달릴 수 있다.
"그래! 중학교 중간고사 물론 중요하지만, 인생이 단거리 경주도 아니고... 이브? 뭐 그렇게 좋다는데, 그렇게 대단하다는데, 기분 좋게 아이와 함께, 나도 아이처럼 예전 스무 살 때 즐겼던 것처럼 그렇게 놀고 오자!"
콘서트는 내 예상을 깨고 아주 훌륭했다. 관객의 면모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모범생처럼 보이는 10대도 많았는데, 엄마 아빠는 공연장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거 같았다. 힙하고 세련된 느낌의 젊은 여성, 한눈에 일본 문화 오타쿠처럼 보이는 20대 남성들. 그리고 몇 명은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코스프레하고 왔다.
그 많은 관객들은 이브가 노래 사이에 날리는 일본어 멘트를 다 알아듣고 바로바로 리액션을 한다. 덕질하면서 일본어도 배운 모양이다. 우리 막내도 얼추 알아듣는 모양,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물어가며 나는 콘서트를 즐겼다. 너무 놀라운 건, 내가 이브의 노래를 거의 다 알고 있었다는 거. 생각해 보니 교회나 마트 등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참 많이 오랫동안 들어온 것이다! 우리 막내의 큰 그림인가? 내가 앉은자리는 무대의 오른쪽이라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야 무대가 보였는데, 내 옆 오른쪽에 막내가 앉아 있어 무대를 보는 내내 아이의 뒷모습이 함께 걸렸다. 아주 좋다고 난리법석을 떨며 박수를 치고 엉덩이가 의자에서 들썩들썩한다. 워낙 빠른 비트의 노래들인데, 밴드 연주도 화려하고, 무대 전면을 꽉 채운 화면에는 노래 가사와 관련된 이미지와 자막 그리고 아름다운 영상이 계속 보인다. 그리고 변화하는 비트에 맞게 조명이 또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내 느낌에 이브의 노래는 빠르고 강렬하다. 중간에 조금 잔잔하게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러다가도 결국은 빵! 터지듯 폭발하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 그럴 때 무대 가득 조명도 함께 폭발하는데, 그럴 때 관객의 호응이 어마어마하다. 나도 그 순간 가슴이 뻥 뚫리며 이런 게 이 가수의 매력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다고 다 좋은가? 그 혼란스러움, 모호함, 불확실성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거운가? 나는 관객들이 이브의 노래가 폭발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무거운 것들을 던져버리려고, 던져버릴 순 없더라도 그냥 그런 느낌이라도 받으려고. 정신을 홀딱 빼놓을 강렬한 무대 하나가 마무리되자, 막내가 내 귀에 속삭인다.
"엄마 나 이브 너무 좋아, 울 거 같아!"
그러게... 이브, 예상보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에 나 역시 깊은 감동을 받았다. 들어본 적 없다는 이유로 기대를 너무 안 했던 거, 그건 좀 내가 반성할 지점이다. 그리고 나의 스포티파이 러닝 리스트에 이브의 노래를 추가할 거 같다. 뛰는 게 지겨워질 때 노래 중간에 그 폭발하는 지점이 아주 큰 역할을 할 거 같다. 속도를 막 올리고 싶게, 더 달리고 싶게 만들어줄 것이다.
돌아오는 길, 전철 안에 이브 콘서트 관객이 확실한 젊은이들이 보인다.
주최 측이 나눠준 슬로건과 포스터를 손에 쥐고 있다. 그냥 보면 특별할 것도 없다.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자기만의 사랑하는 뮤지션이 있고,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수준 높은 젊은이들이다. 하긴 우리 막내도... 양볼은 아직 어린이처럼 보이는데, (이마는 사춘기지만!) 나는 보도 듣지도 못한 일본 남자 가수를 찾아내, 그 음악이 좋다고, 그의 데뷔와 활동... 하여간 모든 역사를 줄줄 읊고 있다. 신기하다. 물론 기특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애 첫 중간고사를 망치면 엄마의 강렬한 잔소리 폭탄도 감당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