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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혀노블 Aug 28. 2024

회사에서 주는 마지막 월급이 통장에 입금되었다.

내가 27살일 때,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30대 초반의 대표 소개받았다.


그는 매달 월급날이 다가올 때면 직원들 월급을 마련하느라 불안과 초조로 피가 마르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월급이 입금되었을 때 누구 하나 고맙다는 문자 한 통 없어 씁쓸하다고 말했었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할 월급이고, 공짜로 받아가는 것도 아닌데 왜 고맙다고 굳이 표현해 주길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은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직원들에게 내어줄 월급이 없을 때 얼마나 마음이 힘들지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고,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고맙다', '사랑한다'는 낯간지러운 표현 쓰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정도로 성숙해졌다.


회사의 월급날은 24일이다.


24일이 토요일이거나 공휴일이면 날짜를 하루 앞당겨 월급이 입금되었고, 24일이 일요일이면 그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일찍 월급이 들어왔다.


통장을 스쳐가기만 하는 월급일지라도 월급날은 으레 기분이 좋았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월급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시간이 안 갔고, 월급이 입금된 지 보름도 안되어 잔고는 바닥을 보였다.


한 해, 두 해 일과 생활에 치이며 10여 년이 넘는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내 시간은 달음질갔다.


달력으로 날짜를 헤아리지 않아도 월급날은 빠르게 도래했고, 카드값과 보험금, 대출원리금, 자동차 할부금 등등이 빠져나간 뒤에도 여전히 통장 잔고가 남아있 날이 더 많았다.


오늘 회사에서 주는 마지막 월급이 통장에 입금되었다.


'이대로 경단녀가 된다면 회사에서 받는 마지막 월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만감이 교차했다.


아쉬움과 막막함도 잠시, 마지막 월급을 확인했을 때 지난달과 비교 금액 차이가 너무 커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고 인사사이트에 들어갔는데 이번 달 급여 명세서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이번달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회사에서 각종 수당을 다 빼고 기본급만 주기로 한 건가?"


"한 달 치 월급을 줄 때는 기본급만 주겠다고 말을 했어야지, 그런 조건이었다면 권고사직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텐데!"


"회사가 돈이 없어서 이것밖에 줄 수 없다고 말하면 어쩌지? 신임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따져야 하나?"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나서 행동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경영팀 팀장에게 시간 될 때 전화 좀 달라고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금액이 왜 이만큼밖에 안 들어왔는, 퇴사 조건에 내가 흘려들었던 독소조항이 들어있었던 게 아닌, 내가 몰랐던 사실로 월급 금액이 줄어든 게 맞다면 난 이걸 어떻게 요구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오전 10시가 넘어 경영팀 팀장에게 전화가 왔고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회사 사내 헬스장에서 이용하기 위해 결제한 개인 PT금액이 월급에서 일괄 공제되었다는 것이었다.


회사가 이 지경이 된 이후로 개인 PT를 취소했기 때문에 공제될 돈이 없으니 다시 확인해 달라 말했고, 이번 달 급여 명세서 조회가 안되니 그것도 확인해 달라고 했다.


경영팀 확인으로 개인 PT 이용 금액 일부가 잘못 빠져나간 부분은 추후 돌려받기로 했고, 급여명세서는 아침 9시 30분 이후부터 조회가 가능한데 내가 너무 이른 시각에 확인하려 해서 보이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관계를 파악하면 될 것이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정당하게 말해서 수정요청 하면 될 일인데 그게 뭐가 두려워 온갖 설레발로 나 스스로를 힘들게 했을까 싶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고, 잘못된 상황으로 나를 몰아넣어 손해를 볼까 봐 전전긍긍해하는 모습이 속상했다.


하마터면 신임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월급과 관련해 권고사직 때 나에게 말하지 않은 독소조항이 있는 게 아니냐면서 따지는 실수를 할 뻔했으므로...


갑자기 그때 그 소개팅남이 떠 올랐다.


그리고 신임 대표에게 문자를 써 보냈다.


'오늘 마지막 월급이 통장에 입금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임에도 감사드립니다.'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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