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기차의 마지막 등급 - 슬리퍼 클래스
인도의 기차는 여러 등급이 있다.
우리나라처럼 일반석과 특실로 간단히 구분되지 않는다. 나라가 크다 보니 밤새 이동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기차의 대부분은 침대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침대칸도 여러 등급으로 나뉘는데, 등급 중 슬리퍼 클래스 SL–Sleeper class라고 부르는 등급이 있다.
이 슬리퍼 등급은 에어컨도 없고, 창문에 유리도 없다. 침대칸의 마지막 등급으로 제일 싸기 때문에 배낭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다. 1996년과 2003년의 인도 여행에서 우리는 단 한 번도 슬리퍼 클래스를 벗어난 적이 없었고, 은찬이를 데리고 갔던 2017년의 인도 여행에서도 우리는 대부분 이 등급의 기차를 이용했다.
이러한 인도 기차의 여러 등급이 영화와 비슷해 배낭여행자들은 <설국열차>라는 영화가 나온 후 슬리퍼 클래스를 ‘설국열차의 꼬리칸’이라고도 불렀다.
이 날은 조드푸르에서 아즈메르로 떠나는 날이었다. 일요일이라 사람이 미어터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사람이 많으면 꼼짝없이 끼어 앉아 가야 했기 때문에 꽤 걱정하며 기차에 올랐으나 다행히 여유가 있었다. 기차에 타면 대부분 우리의 자리에는 당연한 듯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언젠가 남편과 둘이 여행할 때였다. 기차를 타니 우리가 껴 앉을자리도 없어서 앉아 있는 인도인들에게 여기랑 여기가 우리 자리라는 손짓을 했다. 필시 누군가는 자기 자리가 아니련만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대신 조금씩 더 바싹 붙어 앉아 공간을 조금 만들어줄 뿐이었다. 그렇게 앉으면 모두가 불편할 텐데 그 누구도 표 없이 앉아 있는 인도인을 색출해내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 표를 까 보자 말하고 싶었지만 우리는 그들 속으로 들어온 이방인이었다.
우리가 앉기엔 너무나 좁다고 말하니 불편하게 앉아 있던 인도인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냥 다 함께 같이 가는 거야. 그게 인도의 방식이다.”
하여 아이를 데리고 타는 일요일의 기차가 걱정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붐비는 기차는 아니었다.
아즈메르까지 가는 기차는 다행히 자리가 여유로웠고, 위쪽의 침상도 대부분 비어 있었다.
전날 허리를 삐끗했던 나는 기차에 오르자마자 비어있는 통로의 위쪽 침상으로 올라가 누웠다. 새벽 내내 울려 퍼지는 개들의 영역 다툼 소리에 잠을 잘 자지 못했기 때문에 눈이라도 붙여보려 했지만 슬리퍼 칸은 언제나 그렇듯 시끄러웠다.
아침 9시쯤이 되자 기차 안은 더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기차의 선풍기 켜는 소리가 들렸고, 날개에 두꺼운 기름 먼지를 덮고 있는 선풍기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만 내는 낡은 선풍기는 좀처럼 더위를 식혀주지 못했다.
한여름도 아닌데 기차의 철판이 점점 달궈지기 시작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뚫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눈을 가늘게 뜬 은찬이가 보였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세차게 날리는 것을 보니 최소한 나처럼 덥지는 않겠다 싶어 안심했다.
창문도 없는 위쪽 침상에 누운 나의 옷은 벌써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여섯 시간이나 타고 가야 하는데 이제 고작 두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손을 뻗어 천장과 내 옆의 철판을 만져보니 뜨끈뜨끈하다. 이미 침상의 비닐 커버와 옷과 피부는 축축해져서 혼연일체가 되었고, 나는 힘없는 짐승처럼 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시끄러운 기차 소리와 선풍기 소리를 뚫고 아주 희미하게 흥얼거리는 은찬이의 허밍이 들려왔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은찬이의 노래 가닥을 겨우 찾아내 놓치지 않고 몽롱한 정신을 붙잡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래를 보니 은찬이는 여전히 이어폰을 낀 채로 몸을 흔들흔들하며 음악을 즐기고 있다. 철판은 이제 뜨거울 지경이 되었고, 문득 노예선에 대해 읽은 것이 생각났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미국으로 실어 나를 때에는 더 이상 태울 수 없을 때까지 꽉꽉 밀어 넣었다지. 게다가 그 노예선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적도를 따라 이동했다는데, 그때 그들이 겪었을 더위는 어땠을까.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냥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미국 땅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절반은 죽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나는 고작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누워서, 그저 덥다는 이유만으로 노예선을 떠올렸다.
더위를 못 견디고 내려가니 은찬이 옆에 앉아 있던 인도인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은찬이에게 너무 좁아서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맨 위쪽의 침대를 한번 보라고 했다.
“엄마랑 아빠랑 예전에 여행할 때 저 맨 위에 있는 침대에서 열아홉 시간이나 있었다?”
“에? 저기서? 저 침대 하나에?”
“응. 저 하나에 둘이. 게다가 큰 배낭 두 개랑 작은 가방 두 개도 저기 에 같이 있었어.”
“말도 안 돼. 그게 말이 돼? 저기는 나 혼자나 누울 정도인데?”
“그치.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데, 그게 가능하더라니까?”
“은찬아,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침대칸이 몇 자리지?”
“통로까지 여덟 명자리.”
“맞아. 낮에는 가운데 침대를 접고 지금처럼 맨 아래 침대에 같이 앉아 가고, 밤에는 각자 침대에 누워서 자는 거잖아. 그런데 그때 기차에 타니 까 이 여덟 명 자리에 이미 서른여덟 명이나 있었어.”
“무슨 소리야. 서른여덟 명이 여기에 어떻게 있어?”
기차가 아즈메르에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그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2003년 11월. 우리의 두 번째 인도 여행 때였다. 다르질링에서 바라나시로 가려던 우리는 기차표 구하 기가 힘들기로 악명 높은 뉴잘패구리역에 당도했다. 우리의 기차표 역시 며칠 동안 구하지 못해 웃돈을 얹어서 겨우 구한 것이었다.
기차역은 이미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잘못하면 떠밀려 플랫폼에서 떨어질 지경이었다. 연착된 기차가 언제 올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면서 화장실 가는 것을 참은 지도 몇 시간째였다. 기차는 세 시간이나 늦게 당도했다. 기차가 도착하자 자기들이 탈 칸을 찾아 헤매느라 많은 인파가 일시에 움직였다. 우리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그 인파 속에서 우리가 타야 하는 칸을 용케 찾았지만 타려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서 압사 직전이 되었다.
기차에 이미 타 있던 사람들은 밖의 모습을 보더니 급기야는 기차 문을 안에서 잠그는 사태가 벌어졌다. 밖에서 오래 기차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화가 날대로 나서 기차 문을 부술 지경이었고, 안쪽에서는 열어주면 안 된다고 작정한 듯 문을 잠근 채 아우성이었다.
아비규환의 현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었다. 타려는 사람과 못 타게 하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인 이곳에서 열차는 몇 시간은 이러고 있을 심산이었다. 우리도 문을 두드리고 밀기 시작했다. 안에서 내려야 하는 사람이 있던 건지 문이 아주 살짝 열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밖의 사람들이 힘으로 문을 밀어 열기 시작했다. 앞쪽에 있던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미는 힘에 꽉 찬 열차에 들어섰고, 고개를 돌려보니 남편은 아직 밖에 있었다. 안쪽 사람들은 놀라서 다시 문을 닫으려 했고, 나는 사색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문에 매달린 남편의 배낭끈을 용케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남편은 발버둥을 치며 겨우 기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올라탄 기차에서 본 풍경은 지옥불에 떨어진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침상은 당연하고, 복도 어느 한 곳도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몇 겹으로 포개져 있는지 헤아려볼 수 도 없었다. 우리의 자리에는 몇 명인지도 모를 사람들로 가득했고, 우리는 이 기차를 타고 열여섯 시간을 가야 하는 암담함에 실신할 지경이었다.
다시 기차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에게 사정도 하고 싸우기도 해서 우리 두 자리 중 단 한 자리, 제일 위쪽의 침대 하나를 차지했다. 그곳에 우리의 배낭 두 개를 넣으니 더 이상의 자리는 없었지만 지옥불에 떨어질 수는 없기에 어떻게든 우리는 몸을 얇게 펴서 배낭 위로 몸을 얹고 다리는 아래로 대롱대롱 내려뜨렸다.
그러고 한숨을 돌리고 나서 시계를 보니 놀랍게도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단지 기차에 들어와서 우리 자리에 몸을 뉘었을 뿐인데! 그때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생각이 몸을 지배하는 것인지 화장실에 가고 싶은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토록 발을 구르며 기차를 타면 화장실에 갈 생각뿐이었건만 나의 방광은 이 사태에 놀라서 용량을 대폭 늘린 모양이었다. 새벽에도 잠을 자는 사람은 드물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라 모두가 뜬 눈으로 힘겹게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아직도 아래로는 사람들이 몇 겹으로 포개져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낮까지 버티려면 새벽에 한 번은 화장실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한참을 고민하다 내려갔다. 사실 화장실은 바로 3미터 앞에 있었다. 하지만 고작 3미터를 다녀오기 위해 각오에 각오를 해야만 했다.
사람들 사이로 발을 디딜 곳을 찾아 계속 누군가를 밟았고, ‘쏘리’라는 말을 50번은 더 해야 했다. 불도 켜지지 않는 흔들리는 기차의 깜깜한 화장실에서 나는 용케 자빠지지 않고 볼일을 보고 나왔다. 다시 사람들을 헤치고 밟으며 돌아오는 길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한 인도인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물었다.
“이런 인도의 기차를 타니 어때?”
모두가 지친 새벽, 수많은 인도인들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했다.
“This is India. I love India.”
그 말을 들은 인도인들의 환호와 웃음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 기차는 연착에 연착을 거듭했고, 우리는 열아홉 시간 후에나 그곳을 벗어났다.
“은찬아, 엄마랑 아빠가 그런 기차를 한번 겪고 나니까 그다음에는 어떤 기차를 타도, 어떤 상황이 와도 그게 아무것도 아니더라.”
“나는 못 견뎠을 것 같아.”
아이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누구든지 닥치면 견딜 수 있는 거야. 게다가 너는 남자니까 몰래 페트병에 쉬를 할 수도 있어!”
“안 돼! 난 절대 화장실이 아닌 데서 오줌을 누지 않을 거야.”
은찬이의 절규에 한바탕 웃었다.
“근데 진짜 어이없는 게 뭔지 알아? 엄마, 아빠가 계속 기차표가 없어서 며칠이나 기다렸는데, 사실 일등석은 표가 있었을 거야. 그리고 그 일등석을 샀으면 그 고생은 하지도 않았을 거고. 근데 그때는 이 슬리퍼 클래스 말고 다른 등급을 탈 생각은 아예 못했었다?”
“맞아. 거긴 사람이 별로 없었을 거 아니야. 엄청 비싸니까. 왜 일등석을 안 사고 그 고생을 했어?”
“배낭여행자는 그런 거야.”
유리가 끼워져있지 않은 창문 때문에 온통 먼지투성이인 데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밤새 잠을 이루기도 힘든 슬리퍼 클래스.
아무리 일등석이 좋다 한들 그곳에서는 이곳의 정겨움을 알지 못한다. 짐작도 못할 것이다.
새벽을 여는 짜이 왈라들의 외침에 하나둘씩 일어나 맞이하던 아침과 뽀얀 김을 호호 불어 짜이를 마시며 나누던 눈인사!
인도인들과 계속되는 농담, 기차 안에서도 이어지는 사진 찍기, 역마다 온갖 상인들의 재촉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작은 일에도 모두가 한바탕 들썩이는 곳.
그것이 ‘그냥 다 함께 같이 가는’ 슬리퍼 클래스, 꼬리칸의 매력이다.
아래부터는 또 다른 날의 슬리퍼 클래스다.
생전 처음으로 사람이 거의 없는 슬리퍼 클래스인 데다가 상태도 꽤 괜찮은 기차였기에 사진을 좀 찍어두었다.
창문이 없는 기차를 상상해보라. 먼지 섞인 바람이 내내 들어온다.
또 겨울에는 엄청나게 춥다. 당연히 난방장치가 엎고 창문 덮개를 덮어도 철판 사이로 무지하게 바람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겨울에 밤기차 타면 두꺼운 담요를 둘둘 말고 자야 한다. 그래도 춥다. 예전에 담요 없이 탄 외국인 여행자를 본 적이 있는데, 아침에 보니 모든 옷과 모든 수건을 꺼내어 덮고 오그라들어 잠들어 있는 걸 봤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슬리퍼는 난생처음이었다. 세 번에 걸쳐 몇 달이나 인도 여행을 하면서 이런 슬리퍼는 처음 경험했다.
언제나 사람이 미어터지는 게 슬리퍼인데 이 기차는 어찌 된 영문인지!
무슨 방송이 나왔으려나? 우리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엄청나게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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