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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Jan 26. 2024

연재일을 지키는 건 나와의 약속이야

나도 놀라 버린 말의 힘

3박 4일의 일본 여행을 앞두고 남편과 고등학생 큰딸이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짰다. 비행기는 어느 항공사로 해야 우리가 원하는 왕복 시간대와 가격으로 맞출 수 있을 것인지, 3일 밤을 맡길 안락하고 교통이 편리한 숙소는 어디 일지, 나리타 공항과 도쿄 시내를 바로 오가는 스카이라이너 고속철도와 24, 48시간 지하철권 및 현지 장소들 중 미리 예약해둬야 할 것들을 검토해 앱을 다운로드하고 QR코드를 저장하느라 바빴다. 블로그와 인스타에 있는 수많은 게시물을 훑어보고 같은 곳을 이미 다녀온 지인들의 정보를 수집했으며 현지 날씨를 미리 체크해 명소와 쇼핑몰, 식당들을 추리고 메모하면서 우리 가족의 동선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아이들이 어릴 땐 여행지에서 먹는 것과 자는 곳에 가장 신경을 썼다. 대중교통보다는 렌터카를 이용해 돌아다녔고 잠자리는 넓고 깨끗한 곳, 식사도 무조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장소 위주로 골랐다. 일본의 숙소로는 료칸이나 호텔, 식사는 코스 요리인 가이세키나 호텔 뷔페가 좋았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고등학생, 중학생이 되니 예전의 제약들이 전부 사라졌다. 까다롭게 잠자리와 식당을 고를 필요가 없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오래 걸어도 상관없고 맛집을 찾아 아무리 헤매어도 괜찮고 숙소가 다소 좁고 불편하더라도 감수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예전에는 여행지 정보를 찾고 계획을 짜는 건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다. 꼼꼼한 성격인 나는 사전 정보를 얼마나 얻느냐가 후회하지 않는 여행을 만든다고 믿었기에 날밤을 세며 인터넷을 헤맸고 수 차례에 걸쳐 계획을 수정하느라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곤 했었다. 그런데 이젠 큰딸이 나서서 척척 정보를 파악하고 어딜 어떻게 가고 어디서 무엇을 먹을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간추려주니 얼마나 속 편한 세상이 되었는지. 나는 그저 딸애의 의견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아 오케이 사인만 보내면 되었고 남편은 지갑 열어 결제를 해주었다. 아, 살다 보니 여행이 이렇게 간단해지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남편의 눈에는 내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왜 아무것도 안 하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아 나도 바빠 죽겠어!"


딱 봐도 여행과는 상관없는 걸 하는 중인 내가 바쁘다니 남편은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뭣 때문에 바쁘냐고 되레 물었다.


"뭐 하기는... 글 쓰느라 바쁘지!"


글? 여기서 글이 왜 나와? 눈만 끔뻑끔뻑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괜한 말을 꺼냈나 싶어 살짝 간이 쪼그라들었지만 이왕지사 말을 꺼낸 거 당당하게 밀어붙이자 마음먹었다.


"브런치라고 있어! 나 요즘 거기에 글 쓰는데 금, 토, 월요일에 연재한다 말야! 여행 가서 어떻게 써? 미리 써놓고 가야 하는데 아직 하나도 못 썼어."


'브런치, 연재, 글'이란 내 남편에게는 생소한 말이었다. 특히 '연재'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하며 그걸 왜 꼭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대꾸했다.


그렇지. 나도 브런치에 다시 돌아와 오랜만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놀랐던 게 연재 브런치북 만들기와 매주 스스로 정한 요일에 글을 쓰고 추후 발간하는 시스템이었다. 내킬 때 쓰면 되던 글쓰기가 이젠 자기가 정한 날짜에 꼭 발행해야 하는 글이 된 것이다.


남편 왈, "에이 고민하지 말고 그냥 갔다 와서 써! 누가 알아준다고 그래."


그 말을 들은 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줄이야.


"무슨 소리! 연재일을 지키는 건 독자와의 약속이자 나 자신과의 약속이야!"


헉! 말해 놓고 나도 진심 놀랐다. 책임감은 물론이고 자부심까지 생기게 된 브런치 글쓰기에 나의 마음가짐도 그새 달라져 있었나 보다. 결국 나는 여행 전에 연재글 세 편을 완성했고 일본에서 머물던 요일마다 한 편씩 올릴 수 있었다. 여행만큼 뿌듯했던 그 순간이 지난 연재까지 있었던 일이었고 여행이 끝나 다시 돌아온 연재일에 나는 무엇을 쓸까 머리를 쥐어뜯다가 여기까지 썼다.


글은 쓰면 쓸수록 참 요상하다. 단 한 줄도 쓸 수 없을 것 같을 때마다 온 우주의 힘으로 이루어진 에너지가 깨어나 뭐라도 쓰게 되는 경이로움이랄까. 일단 쓰려고 마음 먹자. 최근에 글과 마주하며 생긴 나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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