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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서 사르트르

본질에서 실존으로

by 이다한 Feb 13. 2025


니체(Friedrich Nietzsche)와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모두 기존의 전통 철학을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 철학자들이지만, 그들의 사상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아래에서 주요 개념들을 중심으로 비교해 보자.


1. 신에 대한 태도: 신의 죽음 vs. 신의 부재

• 니체: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 니체는 기독교적 가치관과 절대적 도덕이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보았다.

• 신이 죽음으로써 인간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 그러나 니체는 인간이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초인(Übermensch) 개념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사르트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사르트르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신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신이 없다는 것은 어떤 선천적인 본질이나 목적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행동을 통해 본질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공통점: 두 철학자 모두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본다.

 차이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며 허무주의를 극복하려 했고, 사르트르는 애초에 신이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2. 자유와 인간 존재

• 니체:

• 인간은 기존의 도덕과 사회적 규범을 초월해야 한다.

• 초인(Übermensch) 은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하는 자이다.

• 인간은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 하며, 이를 권력 의지(Wille zur Macht) 라고 불렀다.

• 사르트르:

•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로 인해 책임도 따른다.

•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인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는 말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본질이 없으며, 자신의 선택을 통해 본질을 형성해 나간다는 뜻이다.

• “인간은 자유롭도록 강요받았다.” 즉, 인간은 모든 선택을 스스로 해야 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공통점: 인간은 기존의 도덕과 규범을 넘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창조해야 한다고 본다.

 차이점: 니체는 힘과 의지를 강조하며 초인의 개념을 제시했지만, 사르트르는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했다.


3. 허무주의와 극복 방식

• 니체:

• 신이 죽은 이후 인간은 허무주의(Nihilism)에 빠질 위험이 있다.

•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새로운 가치 체계를 창조해야 한다.

• 초인(Übermensch) 은 기존의 도덕적 관념을 거부하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 사르트르:

• 허무주의보다는 “불안”(Angoisse, Angst)에 주목했다.

•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모든 선택을 스스로 해야 하며, 이로 인해 존재의 무게와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 따라서 인간은 자기기만(Bad Faith) 을 피하고, 자신의 자유를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공통점: 둘 다 허무주의를 문제로 인식했으며, 이를 극복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차이점: 니체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의 개념을 강조했고, 사르트르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했다.


4. 윤리와 도덕

• 니체:

• 기존의 기독교적 도덕은 약자의 도덕이며,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 “노예 도덕”(slave morality) vs. “주인 도덕”(master morality)을 구분하며, 강한 자(초인)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사르트르:

• 인간은 절대적 도덕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선택이 곧 도덕적 책임을 수반함을 깨달아야 한다.

• “타인의 시선(Look of the Other)” 개념을 통해, 우리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존재를 인식하지만, 그 시선에 종속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통점: 기존의 전통적 도덕을 비판하고, 새로운 윤리를 모색했다.

 차이점: 니체는 강자의 도덕을 강조하며 기존의 도덕을 완전히 부정했지만, 사르트르는 도덕적 책임을 강조했다.


5. 삶의 태도: 긍정 vs. 실존적 불안

• 니체:

• 삶을 긍정해야 하며, 이를 위해 운명애(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를 강조했다.

•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 개념을 통해, 같은 삶을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 사르트르:

• 실존주의적 불안과 고독 속에서도 자신의 자유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 하지만 인간은 “구역질(Nausea)” 과 같은 실존적 불안을 경험하게 되며, 이로 인해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게 된다.


 공통점: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차이점: 니체는 삶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르트르는 불안과 구역질 속에서도 자유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종 정리: 니체 vs. 사르트르


구분 니체(Nietzsche) 사르트르(Sartre)

신에 대한 입장 “신은 죽었다.” (기독교적 가치 붕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인간의 자유 초인이 되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인간은 선택의 자유와 책임을 가진다.

허무주의 극복 초인의 가치 창조 선택과 실존적 책임

도덕과 윤리 기존 도덕(노예 도덕)을 부정하고 주인 도덕을 창조해야 한다. 절대적 도덕은 없지만, 선택이 곧 책임을 수반한다.

삶의 태도 운명을 사랑하고, 삶을 긍정해야 한다. 불안과 구역질 속에서도 자유를 수용해야 한다.


결론


니체와 사르트르는 모두 전통적 가치와 신 중심의 철학을 부정하고,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니체는 강한 의지와 초인을 통한 가치 창조를 강조한 반면, 사르트르는 자유와 선택의 책임을 강조했다.


결국 니체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췄고, 사르트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했다고 볼 수 있다.




니체처럼 살다가 사르트르처럼 살게 되네


창조적으로 이것저것 도전하며 위버멘쉬처럼 살면서 느낀 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였다.

나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사람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걸 정리하는 건 개인의 경험과 기준, 사회적 편견, 사회적 기준일 뿐..


중요한 건, 살다보면 점점 그걸 무시하고 살 수가 없다. 나만 가치를 창조하면 뭐하나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않으면 오해받고 내 실존에 위협을 받는데..

과감하게 버리거나 연기를 하거나 타협하거나.. 점점 선택과 그에 따른 기회비용이 커진다.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본질이 있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점점 방법론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난 이제 방법을 찾았다. 정답은 없다. 지금 찾은 방법도 훗날 보면 이게 최선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한편으로는 다 아니까 할 수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 계속 반복된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게 사르트르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사회가 중요한 거다. 그런데 사회적 규범은 바뀌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이런 고령화 사회에서는 더더욱.. 웃긴건 내 창의력과 사랑이 이걸 이겨낼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걸 깨닫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이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져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게 많이 줄어들었다. 인생의 저점을 제대로 찍었다. 내 지향점은 여전하다. 실존으로 본질을 챙기는 것.. 사실 이럴 줄 알았다. 한국사회에서 본질로 실존을 만들어내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 그래서 계속 실존에 대한 대비를 해왔었던 거고..


본질로 실존에 영향을 줄 정도면 사실 사이비 교주나 사상가가 되어야지.. 그런데 그쪽 세계는 '정의'가 통하지 않는다.. 그쪽 세계는 '기'가 중요하다. 난 그렇게 생각보다 '기'가 세지는 않고.. 말도 안 되는 말, 겉으로 포장하는 음침한 말로 사람 마음을 현혹시키는 건 딱 질색이다. 언제나 행동까지 해야한다.


내가 살면서 꼭 지키는 태도가 하나 있는데, 항상 '끝까지' 지켜본다는 것이다. 사건은 모두 온갖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 (이래서 양자역학을 철학에 적용시킨 걸 좋아한다.) 그걸 단정짓는 것은 현실적인 한계와 본인의 오해와 포기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한테 말로 개수작을 부리든, 무례하게 하든 일단 가만히 지켜본다. 그 의도가 그게 아닐 수도 있거든. 말을 예쁘게 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 수도 있거든. 행동은 그렇지 않을 수 있거든. 츤데레 같은 거 말이다. 또 지금 기분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으니까. 난 굳이 따지자면 말보다 행동이 중요해서. 반대로, 말 예쁘게 하는 사람도 행동을 본다. 말만 그런 사람들 많거든. 그리고 예쁜 말에 악의를 집어넣는 사람도 많으니까. 실질적 도움 없이 말만 예쁘게 하는 사람들도 내 스타일은 아니고.. 물론 둘 다 잘 하는 게 베스트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드무니까.


(그런데 이런 걸 모든 이들에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예와 의리는 지킬 사람에게만 지키는 거다.. 그리고 그 기준을 이제야 정한듯 하다.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했을 뿐인데, 내 실존과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오해를 엄청 해서 피곤했다. 한편으로는 내 태도는 내가 컨트롤 하고 있으니 상대파악이 더 잘 되기도 했다. 독립변수 종속변수 마냥)


그래서 보통 나는 사람도 사건도 길게 보고 최대한의 경우의 수로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온갖 경우의 수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평소에 다각적인 상상을 많이 하고, 호기심이 많아 여러 체험도 많이 하고 그에 따른 체화된 감각들을 이용한다.


이게 통찰력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난 촉이 좋은 게 아니다. 근거를 찾아서 추리를 잘 하는 거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추리를 해보는 거다. 난 영적인 걸 믿지 않는다. 영적이라고 생각되는 게 '본질'일 뿐이다.


통찰력은 필수적으로 아는 것에 대한 겁이 없어야 확장할 수 있다. 탐구심이 있어야 한다.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단정짓고, 오해하면 우물 속에 개구리 가만히 인형이 된다. 난 그들이 안타까웠고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알게 된 건, 그 우물을 만드는 게 단순히 두려움이 아니라 '혐오'라는 거다. 난 싫어도 했던 게 참 많았던 거다. 호기심이 두려움도 혐오도 이겨냈던 거고, 그 과정 속에서 혐오가 사랑이 된 경험도 많았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혐오를 이겨내지 못한다. 그렇게 스스로 썩는다. 난 그런 사람들을 혐오한다. 그런 사람까지 품어줄 정도로 내 사랑이 강하지 않다. 결국 나도 혐오에 혐오로 맞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싸우게 된다. '기'가 정말 세다면 이것까지 품어줬어야 한다. 여기서 내가 '기'가 세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감정 그릇이 그렇게 튼튼하고 넓은 편이 아니다. 결국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은 실존의 세계라는 것 또한 알게 됐다. 팩트는 계속 담아낼 수 있더라.


또 나이도 있다.. 이제 사람들이 내 본질보다 실존을 보더라.. 어렸을 때랑 이미지가 많이 바뀌어서 도대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이젠 가늠이 안가. 예전엔 대충 그거에 맞춰서 사회생활을 했는데, 이젠 모르겠어.. 그래서 더욱 나대로 사는게 가능해진 것 같기도 하다.


또 나이들수록 본질을 보고 그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는 인간들의 확률이 낮다. 특히 이 좁아터진 한국에서는 더더욱. 좋은 가능성이 있는데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싶은 사람들도 많다. 난 이게 지능문제라고 본다. 지능이 높아야 창조를 하니까. 또는 실존의 문제..나도 실존을 지키고자 도려낸 것들이 많다.


실존만 해결되면 난 정말 날아다녔을 것 같다.. 실존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본질의 세상을 펼치면 거짓말쟁이가 되더라. 그런데 사실 그게 맞으니까. 법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보면 그렇다. 팩트체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야 되는데, 현실을 상상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많다.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건 사업, 발명, 창조, 사회발전이고, 현실을 상상으로 만드는 게 종교, 정치다.


(높은 상상력과 현실적 힘이 같이 가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래서 옛날 메디치가 현실적인 서포트를 예술가들에게 해준 게 아닐까..)


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고 싶은 사람이고, 그걸 잘 하는 편이지, 현실을 상상으로 바꾸는 건 젬병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좀 더 쉽게 얘기하면 미지의 영역을 어떠한 내가 속한 현실의 기득권들에게 주입해서 실존영역을 넓히고 싶은 거지, 이미 똘똘 뭉친 것들의 세계를 미지의 영역으로 끌고오지는 못한다는 거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왜냐면 그건 썩었거든.. 그 썩은 걸 예쁘게 포장해서 보여준다고 한들..


주제파악도 된다. 실존적 주제. 본질적으로는 초인이어도, 실존적으로 받쳐주는 게 없으면 안 된다. 항상 본질과 실존을 같이 키워왔는데, 이번에 실존에 위협을 받으면서 본질적인 작업을 엄청 한 것 같다. 감정그릇도 더 키우고, 기준도 제대로 세우고, 방법도 다시 찾고.. 이제 실존 챙기러 다시 떠나는 여정.. 이번엔 정말 긴 여정이 될 것 같다. 나 자신..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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