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실존주의 시리즈
2005년 영국 공영 방송국인 BBC에서 “Our Time’s Greatest Philsopher: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란 제목의 설문조사(일종의 천하제일 철학왕 대회)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BBC가 순위 매기는 설문조사를 은근히 많이 한다.) 라디오 청취차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였는데 결과가 재밌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고전철학 3인방이 각각 8위, 5위, 9위를 차지한 걸보면 ‘우리시대’의 범위를 참 넓게 잡았구나란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데 모든 각주의 원문이신 플라톤 님이 5위 밖에 안된다고? 좀 의외다. 더 의외의 결과는 바로 대망의 1위인데, 마르크스가 무려 27%의 득표율로 그 영광을 차지했다. CNN이 이 설문조사를 했으면 마르크스는 아마 30위 안에도 못들었을거 같은데 아마도 마르크스가 독일 사람이긴 해도 주로 영국에서 활동을 많이 해서 홈 어드밴티지 점수를 후하게 준거 같다. 마르크스 다음으로는 흄이 2위(12%)를 차지했고, 칸트는 6위(5%)에 자리했다. (흠. 흄이 장난아닌 아닌 선배인건 알겠지만 칸트를 이겼다고? 흄은 진짜 홈 어드밴티지를 많이 받은 것 같다.)
칸트의 업적은 참으로 많지만 최대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합리주의(데카르트)와 경험주의(흄) 두 진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칸트의 등장은 마치 혜성과도 같아서, 오랜 세월 동안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두 무림 세력을 일거에 제압하고 새롭게 떠오른 신흥강자 같지 않았을까. 합리주의와 경험주의가 서로 피 터지게 싸우고 있을 때 칸트가 보기엔 둘 다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그래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직관 없는 개념은 합리주의를 의미하며, 반대로 개념 없는 직관은 경험주의를 뜻한다. 칸트는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한 고전적 합리주의에서 주장하는 신과 도덕규범 같은 감각을 초월하는 공허한 대상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례를 수집하고 실험을 반복해도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등장해 이전의 경험을 부정할 수 있는데도, 지금까지의 경험만을 가지고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맹목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칸트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절충을 시도했는데, 이는 곧 자칭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되고 만다. 칸트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식의 시작이 경험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시간이나 공간, 인과성 같이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질서가 있다고 보았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사의하더라도 그 사건이 발생한 시간과 공간이 있을 것이며 왜 그 사건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원인과 결과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느 날 셜록 홈스는 런던 경시청으로부터 살인사건이 발생했으니 도와달라는 전갈을 받는다. 현장에 도착한 홈스는 피해자가 언제 살해를 당했는지 질문했다. 그런데 경찰은 피해자가 살해당한 시간이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홈스가 다시 물어본다. ‘그럼 어디에서 피해자가 죽었나요?’ ‘죽은 장소가 없습니다.’ 이제 홈스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피해자는 분명 죽었는데, 살해당한 시간과 장소가 없다니.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었나요? 사인이 뭔가요?’ 경찰의 마지막 대답. ‘죽은 원인이 없습니다.’
가상의 상황이지만 어이없음의 연속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관계는 우리의 인식을 돕는 근본적인 질서다. 게다가 이러한 질서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경험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질서는 인식의 주체인 우리한테서 나와야만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이건 경험 이전에 가지고 있는 질서이자 형식이어야 하므로 선험적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칸트식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는 부분인데, 칸트 이전까지는 주체(인간)가 객체(대상)로부터 영향을 받아 인식이 만들어진다고 여겨졌다면 이제는 인식의 주체에게 질서가 주어졌기 때문에 거꾸로 객체가 주체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쉽게 말해 ‘주객전도’, 인식의 방향이 180도 전환된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이 의식의 주체로서 세상의 의미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도 같다.
게다가 칸트는 새롭게 탄생한 의식을 가진 주체에게 선택의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또 계몽주의란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선택과 책임이라니, 이건 흡사 실존주의의 서막을 여는 것만 같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이성은 자유로운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이성인데 이걸 실천이성이라 부를 수 있다.
물론 칸트의 실천이성이 우리에게 무엇이 선(善)인지를 알려주고 우리는 이걸 정언명령으로 받들어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했을 때 칸트가 만든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개인이 정말로 자유로울지는 의문이 든다. 또한 무엇이 올바른가? 라는 질문에 칸트는 이미 정해진 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 칸트의 사상을 실존주의에 바로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칸트와 실존주의의 연결고리는 의식을 가진 주체를 등장시켰다는 점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사실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칸트가 없었으면 이후 후설, 하이데거는 물론이고 사르트르, 카뮈도 없었다.
정리하자면 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모든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경험은 수많은 인상과 관념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인간은 인상과 관념 덩어리이지, 통일된 주체가 아니다. 칸트도 경험을 중요시하지만, 흄보다 더 나아가서 정리되지 않은 경험에 보편타당한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고 그 결과 주체에서 객체로 향하는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 냈다. 무엇보다 주체가 지닌 ‘의식’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는 판을 깔았다는 게 결정적이다. 이렇듯 흄과 칸트는 본인들이 절대 의도하지 않았고, 살아있을 때도 몰랐겠지만 이제부터 살펴볼(이제부터??) 현상학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현상학자들이 주장하는 현상(phenomenon)은 흄의 인상(impression)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의식의 주체로서 나의 의식이 객체인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칸트의 주장은 현상학의 핵심인 지향성 이론(theory of intentionality)으로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