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루쉰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픈옹달 Jan 17. 2019

루쉰의 여러 얼굴들 #3

우리실험자들 열린강좌

루쉰의 여러 얼굴들 - 광인, 길손, 전사 그리고 그림자 #1 / #2 / #3 / #4 / #5



4. 길손 


그런 면에서 그가 <광인일기>를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끝맺는 것은 인상 깊다. <광인일기>는 제목처럼 화자가 광인의 일기를 엿보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일기의 주인공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화자는 아무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다. 다만 광인의 마지막 질문과 호소를 냉랭하게 담고 있을 뿐이다.


사람을 먹어 본 적 없는 아이가 혹 아직도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광인일기>


그는 한 시대의 종말은 한 시대의 인간의 소멸과 함께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꺼이 소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뿐인가. 설사 소멸을 기꺼워한다 하더라도 소멸에 이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자연스러운 소멸이란, 자연스러운 죽음이란 결코 쉬이 찾아오지 않는 법. 그렇다면 그 시간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미 모순을 자각하였으나, 아직 새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혁명을 입에 담는 여느 사람이라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시간이 도래하도록 미래를 호명해야 하며, 구시대의 유물을 척살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루쉰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와 광인은 혁명가가 될 수 없었다. 이는 광인 스스로도 무고한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나, 희망이라는 전도前道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긴 필멸의 존재가, 소멸해야 할 존재가 어찌 희망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으랴. 


희망, 이 희망의 방패로 공허 속 어둔 밤의 내습來襲에 항거하였다. 방패 뒤쪽도 공허 속의 어둔 밤이기는 마찬가지이건만. 그러나 그런식으로, 나는 내 청춘을 줄곧, 소진하고 있었다. 
(...) 그런데 지금, 왜 이리 적막한가? 몸 밖의 청춘도 죄다 스러지고 세상 청년들이 죄 늙어지고 말았단 말인가?
(...) 나는 몸소 이 공허 속의 어둔 밤에 육박하는 수밖에 없다. 몸 밖에서 청춘을 찾지 못한다면 내 몸 안의 어둠이라도 몰아내야 한다. 그러나, 어둔 밤은 어디 있는가? 지금 별이 없고, 달빛이 없고, 막막한 웃음, 춤사위치는 사랑도 없다. 청년들은 평안하고 내 앞에도, 참된 어둔 밤이 없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마찬가지이다. <희망>


절망.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겠다. 하나는 그가 당면한 시대의 굴곡이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던 까닭이다. 1912년 신해혁명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천 년간 유지된 황제 치하의 천하관이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걸음걸이는 늘 전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후퇴고 있는 법. 황제를 몰아낸 이후에도 낡은 황제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황제의 복벽을 꿈꾸는 이들이며, 낡은 전통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이들까지.


캉유웨이나 옌푸와 같은 인물의 변신은 아무래도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었을 테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낡은 체제의 변화를 주장하던 인물이 전통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는 꼴이라니. 그래도 황제는 있어야 한다며 황제의 복벽을 주장하거나, 공자를 신으로 섬기는 공교孔教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과연 이를 어찌 보아야 할까? 한 연구자는 그들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말한다. 시대가 변했으나 그들이 변하지 않았던 까닭에 그리 되었다는 말이다. 소란스러운 변화 가운데 진보의 이상은 쇠퇴하고, 한때의 진보가 유물로 쇠퇴하는 것을 보았다.

 

절망, 그가 절망을 이야기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존재에 달라붙어 있는 자기에 대한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누구보다 소멸이야말로 자신에게 닥칠 운명이라 여겼다. 


인생에는 고통이 많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아주 쉽게 위안을 받으니, 구태여 하찮은 필묵을 아껴 가며 고독의 비애를 더 맛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 내 생명의 일부분은 바로 이렇게 소모되었으며, 또한 바로 이런 일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줄곧 무엇을 하고 있는지 끝내 알지 못하고 있다. 토목공사에 비유하자면, 일을 해나가면서도 대臺를 쌓는 것인지 구덩이를 파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설령 대를 쌓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그 위에서 떨어지거나 늙어 죽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구덩이를 파는 것이라면 그야 물론 자신을 묻어 버리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요컨대, 지나가고 지나가며, 일체의 것이 다 세월과 더불어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 - 이러할 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주 기꺼이 바라는 바이다. <‘무덤’ 뒤에 쓰다>


자명한 미래란 단 하나 무덤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전도前道에 있지 않다. 미래에 대해 의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 전도가 무너진들, 희망이 사라진 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높은 누대를 쌓는다 해도 이는 스스로가 굴러 떨어질 곳을 마련하는 것이며, 구덩이를 판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묻힐 곳을 마련하는 것일 뿐이다. 루쉰은 자신을 하나의 과도기적 존재, 지나갈 수밖에 없으며, 지나가야 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으나 도리어 그는 과정으로서의 존재를 넘어 불같이 닥쳐올 필멸을 소망하기도 한다. 


문제는 어떻게 이 무덤을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이 필멸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을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길손: 이름요? - 저도 모릅니다. 제가 기억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저는, 혼자였습니다. 제 본래 이름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길을 나선 뒤로 사람들이 되는대로 제 이름을 불렀지만, 가지각색이어서, 저도 기억이 또렷하지 않습니다. 매번 이름이 달랐습니다. (...) 기억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저는, 이렇게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론가 가려고. 그곳은, 앞입니다. (...) 저는 인차 저쪽 앞쪽! 으로, 계속해서 걸어, 갈 것입니다.
(…)
늙은이: 앞? 앞쪽은, 무덤이오. 
(…)
길손: 끝까지 가리라는 보장이 없다고요? ... (생각에 잠겼다가, 깜짝 놀란다) 안 됩니다! 가야 합니다. 되돌아가 봤자 거기에는, 명분이 없는 곳이 없고, 지주가 없는 곳이 없으며, 추방과 감옥이 없는 곳이 없고, 겉에 바른 웃음이 없는 곳이 없고, 눈시울에 눈물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증오합니다.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길손>


그는 <길손>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자신에게 닥친 삶의 현실을 우화적으로 그려낸다. 늙은이와의 대화를 통해 그는 길손, 나그네의 태도 말로 소멸을 상대하는 또 다른 식의 모습이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서 광인의 표상에서 보았듯이 결코 돌아올 수 없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돌아갈 수 없음, 이는 하나의 당위이기도 하며 또한 이는 길손의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그곳은 명문, 지주, 추방과 감옥, 거짓 웃음, 눈물이 있기 때문이다. 모순을 자각하였다 하여 모순으로 회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광인은 결코 '정상인'인 채 할 수 없다. 미쳤다면, 다시 미치는 수밖에는 없는 법. 자기 분열의 분열, 회귀하는 나그네, 돌아가는 길손이란 있을 수 있을까?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또 다른 길. 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것이며 그대로 머물러 주저앉는 것이다. <길손>에서 늙은이는 정확히 이런 존재로 그려진다. 그도 한때는 어떤 목소리를 따라 떠나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늙음'의 미덕을 따라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어디서 출발했는가, 어디로부터 떠나왔는가, 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제 지쳐버렸다는 것이 중요할 뿐. 


루쉰은 <길손>이라는 작품을 통해 시대의 변곡점에, 오르락내리락 요동치는 삶의 피곤함을 호소하고 있다. '저는, 피가 부족합니다. 피를 좀 마셔야 해요.'라는 대사는 그가 직면한 시대와 삶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머무르지 않는 삶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그것, 늙음이란 결국 삶의 모순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길손, 나그네라는 삶의 태도는 그가 늙지 않는 존재가 되게끔 한다. 그는 희망을 잃었으나, 절망을 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매몰되지 않았다. 그는 뚜벅뚜벅 서쪽을 향해 걷는다. 밤빛과 함께. 


(…) 하지만 안 돼! 나는 가야해. 아무래도 가는 게 옳아... (즉시 고개를 들고, 힘차게 서쪽으로 걸어간다.)
(여자아이가 노인을 부축하여 흙집으로 들어서고, 바로 문이 닫힌다. 길손이 들판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밤빛이 그의 뒤를 따른다.) <길손>



* 루쉰의 여러 얼굴들 - 광인, 길손, 전사 그리고 그림자 #1 / #2 / #3 / #4 / #5

* 강의 녹취




* 중국 여행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우리실험자들 홈페이지에 올려두었다. 

http://experimentor.net/we_life?board_name=we_life&mode=view&board_action=modify&board_pid=6&order_by=fn_pid&order_type=desc


매거진의 이전글 루쉰의 여러 얼굴들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