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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an 17. 2019

루쉰의 여러 얼굴들 #4

우리실험자들 열린강좌

루쉰의 여러 얼굴들 - 광인, 길손, 전사 그리고 그림자 #1 / #2 / #3 / #4 / #5



5. 전사


1925년은 루쉰의 개인에게도, 중국에게도 커다란 변화를 요구하는 해였다. 그해, 3월 12일 중국 혁명의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쑨원이 세상을 떠난다. 한 혁명가의 죽음을 보면서 루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루쉰은 <전사와 파리>라는 글에서 시대의 모순에 맞서 싸우는 전사가 있는가 하면 파리처럼 앵앵거리며 시끄럽게 주변을 돌아다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러나 결점을 지닌 전사는 어쨌든 전사이고, 완미完美한 파리 역시 어쨌든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꺼져라, 파리들이여! 비록 날개가 자라나 앵앵거릴 수 있지만, 끝내 전사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 이 벌레들아! <전사와 파리>


루쉰은 순결한 전사를 이상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싸움에는 고결한 싸움이 없듯, 백색의 전사도 없는 법이다. 싸움이란, 삶이란 얼마간의 상처와 핏자국이 남기 마련이다. 도리어 고결함이란, 말끔한 면상이란, 그가 어느 자리에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일 뿐이다. 전사에게는 결점과 상처가 나미 마련. 도리어 파리야 말로 흠 없는 존재이다. 완미한 파리와 쓰러진 전사.


흥미롭게도 그해 3월은 루쉰에게 새로운 관계가 열린 시기이기도 하다. 그는 그해 3월 훗날 아내가 되는 쉬광핑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당시 쉬광핑은 루쉰이 교편을 잡고 있는 베이징여자사범대학 학생이었다.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에 루쉰은 자못 진지한 태도로 답하고 있다.


나는 고통은 언제나 삶과 서로 묶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분리될 때도 있는데, 바로 깊은 잠에 빠졌을 때입니다. 깨어 있을 때 약간이라도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온 방법은 '교만'과 '오만불손'입니다. (...)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가는데 가장 흔히 만나는 난관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림길'입니다. 묵적 선생의 경우에는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나는 울지도 않고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우선 갈림길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숨 자고 나서 갈만하다 싶은 길을 골라 다시 걸어갑니다. 우직한 사람을 만나면 혹 그의 먹거리를 빼앗아 허기를 달랠 수도 있겠지만, 길을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도 전혀 모를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를 만나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굶주려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내려옵니다. 호랑이가 끝내 떠나지 않으면, 나는 나무 위에서 굶어 죽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리 허리띠로 단단히 묶어 두어 시체마저도 절대로 호랑이가 먹도록 주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없다면? 그렇다면 방법이 없으니 하릴없이 호랑이더러 먹으라고 해야겠지만, 그때도 괜찮다면 호랑이를 한 입 물어뜯겠습니다. <먼 곳에서 온 편지 3월 11일>


루쉰의 태도를 잘 볼 수 있는 글이다. 그가 <길손>을 쓴 것은 그해 3월 2일, 쉬광핑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11일, 쑨원이 세상을 떠난 것은 바로 이튿날 12일, <전사와 파리>를 쓴 것은 21일.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루쉰은 수많은 사건을 직면하고 있었다.


과연 그는 무어라 생각했을까. 호랑이를 만났다고 여겼을까? 루쉰이 그 길을 무어라 여겼든 주목할 것은 그가 당혹스런 상황을 만났을 때 대처하겠다는 태도에 있다. 갈림길이라면? 앉아서 좀 쉬다 갈만한 길을 골라 가겠다. 그는 멈추지도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어느 길이 좋은 길인지 헤아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다가 호랑이를 만난다면? 나무 위로 도망쳐야지.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올 리도 만무하다. 호랑이가 돌아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무에서 굶어 죽는 수밖에. 그러나 몸을 칭칭 동여매어 한 입도 내어주지 말아야지. 제 아무리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호랑이라도 굶주려 보아야지. 


이런 태도를 가지는 것은 그가 세계를 끊임없는 문제의 공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삶을 고통의 연속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나 그 문제와 고통에서 도피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만과 오만불손, 다른 글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우쭐대는 자대自大의 정신, 패배를 승리로 치환하는 정신승리법 등등. 허나 루쉰은 그렇지 않다. 아마도 적막 속에서도 끊이지 않는 외침이 있기 때문이리라.


세계가 문제의 공간이라면,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면 어찌해야 할까? 망각을 도피처로 삼지 않는다면 결국 남는 것은 끊임없는 분투의 연속일 뿐이다. 


내게 이런 단평을 짓지 말라고 권한 사람도 있다. 그 호의를 나는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으며, 창작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지어야 할 때라면, 아마 아무래도 이런 것을 지어야 할 것이다. 만약 예술의 궁전에 이렇게 번거로운 금령禁令이 있다면, 차라리 들어가지 않는 게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막 위에 선 채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와 구르는 돌을 바라보면서, 기쁘면 크게 웃고, 슬프면 크게 울부짖고, 화가 나면 마구 욕하고, 설사 모래와 자갈에 온몸이 거칠어지고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며, 때로 자신의 엉긴 피를 어루만지면서 꽃무늬인 양 여길지라도, 중국의 문사들을 좇아 셰익스피어를 모시고 버터 바른 빵을 먹는 재미난 못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 지금은 한 해의 마지막 깊은 밤, 이 밤도 깊어 거의 끝나간다. 나의 생명, 적어도 생명의 일부는 이미 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적는 데에 쓰여졌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내 자신의 영혼의 황량함과 거칠음뿐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이것들을 겁내지도, 덮어 두고 싶지도 않으며, 게다가 정말이지 조금은 이것들을 아끼고 있다. 이건 내가 모래바람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살아온 흔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모래바람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라면 이 말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25년 12월 31일 밤 <‘화개집’ 제기>


1925년을 마무리하며 루쉰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해를 시작하면서 남긴 <희망>과 견주어 보면 대체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는 그해 수많은 글을 지었으며 덩달아 악명도 크게 떨쳤다. 그 가운데는 루쉰에게 실망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작품'을 써내는 '창작'의 정신이 사라졌다며. 그러나 루쉰의 대답은 이렇다. '이런 것을 지어야 할 때라면, 아무래도 이런 것을 지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글쓰기란 시대와 삶을 그렇게 인식한 자가 짊어져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리하여 루쉰은 예술의 궁전에, 문학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도리어 그는 사막 위에서, 모래와 돌이 뒹구는 곳을 자신의 현주소로 인식한다. 그곳은 상처와 고통이 있는 곳, 설사 꽃무늬가 있다 하더라도 엉긴 핏자국이 그렇게 보이는 곳일 뿐. 


루쉰은 그것이 보편적으로 모두를 위한 이야기가 아님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누구의 말처럼 문학이 인종과 계급, 성별, 나이를 뛰어넘는 보편의 전당, 궁궐의 글이라면 루쉰의 글은 소수에게만 의미 있는 광야의 글이다. 어찌 그것을 배제의 글쓰기라 할 수 있을까. 소수, 그의 말을 빌리면 엎치락뒤치락 살고 있는 사람에게만 읽히는 글이다. 하하호호 웃으며 세상을 노래하는 이들은 먼지 가득한, 모래가 입에 씹히고 먼지가 목구멍에 달라붙는 거친 들판의 텁텁한 공기를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세계에 사는 존재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 살아내는 것이며 그다음으로는 주먹을 쥐고, 투창을 쥐어 대항하는 것이다. 물론 조용히 사는 길도 있을 것이다. 그저 모래처럼, 먼지처럼, 흩날리면 흩날리는 대로 사는 삶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쉰이 이야기하건대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은 세계가 거짓과 허위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마구 욕해야 하건만, 무엇인가가 입을 틀어막는다. 루쉰은 이것이 비겁자의 전술이라 말한다. 상대를 멸절한 용기는 없으면서! 슬그머니 괴로움을 주면서도 영원히 그것을 기억하게 할 용기는 없다. 


도리어 용기는 맹사猛士, 사나운 전사에게 있다. 멸절하더라도, 설사 괴로움을 직면하더라도, 그것을 집요하게 기억하는 이. 


반역의 맹사가 인간 세상에 출현한다. 그는 우뚝 서서, 이미 달라졌거나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폐허와 무덤을 뚫어본다. 깊고 넓은 오래된 고통 일체를 기억하고, 겹겹이 쟁여지고 응어리진 피를 직시한다. 죽은 것, 태어나고 있는 것, 태어나려는 것, 태어나지 않은 것 일체를 속속들이 안다. 그는 조물주의 농간을 간파하고 있다. 그가 떨쳐 일어나, 인류를, 소생시키거나 소멸되게 할 것이다. 이들 조물주의 착한 백성들을. <빛바랜 핏자국 속에서>


루쉰의 글쓰기는 1925년을 좌우로 큰 변화를 겪는다. 그는 이러한 글을 잡감이라 불렀다. 시대의 모순을 스스로 자각도 하지 못하는 이들, 학자, 지식인, 문인을 대상으로 그는 수많은 글을 써내었다. 혹자는 그의 총명이 빛을 잃었다 했고, 누군가는 늙은이의 허황된 소리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글은 더욱 예리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전사가 있어야 한다. -

(…) 그가 무물無物의 진으로 들어서자 마주치는 사람마다 한 본새로 인사를 한다. (...) 그것들의 머리 위에 각종 깃발이 나부낀다. 깃발에는 각가지 좋은 명칭을 수놓았다. 자선가, 학자, 문인, 원로, 청년, 아인雅人, 군자 ... 머리 아래 각가지 외투를 걸쳤다. 거기에 여러 가지 좋은 무늬를 수놓았다. 학문, 도덕, 국수國粹, 민의民意, 논리, 공의公義, 동방문명...

그러나 그는 투창을 들었다. <이러한 전사>


이는 그가 허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쉰이 상대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정중앙에 심장이 있다고 했다. 나는 공평하며 정의롭고 무사无私하다고. 공의公義의 탈을 뒤집어쓴 그 논의의 맨 얼굴을 루쉰은 정확히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무릇 전사란 투창을 든 인물이며, 이 투창을 정중앙이 아닌, 왼쪽으로 치우쳐 던지는 사람이라 말한다. 


루쉰은 이 싸움의 전장을 '무물의 진'이라 부른다. 이는 그가 사상계의 전사였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 들어 다양한 논의들이 들끓었다. 이제 변발과 전족은 좀 사라졌지만 싸움의 양상은 더 복잡하게 바뀌었다. 때문에 이 시기 이후의 루쉰의 글은 매우 산만하며 어지럽다. 특정한 주의主義와 문제問題로 그의 글이 수렴되지 않는 것은 그가 당면한 문제가 얼마나 복잡했는지를 보여준다. 


왕성하고도 집요한 글쓰기, 상대를 물어뜯는 커다란 이빨과 강한 턱, 자신을 향한 공격을 가뿐히 흘려버리는 기술까지. 그의 글을 읽노라면 싸움의 귀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의 글을 읽고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이들이 여럿 있겠지. 이때 들러붙는 질문. 그는 어찌하여 원귀寃鬼가 되지 않았나? 그의 글에 지속적으로 보이는 건강함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 루쉰의 여러 얼굴들 - 광인, 길손, 전사 그리고 그림자 #1 / #2 / #3 / #4 / #5

* 강의 녹취




* 중국 여행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우리실험자들 홈페이지에 올려두었다. 

http://experimentor.net/we_life?board_name=we_life&mode=view&board_action=modify&board_pid=6&order_by=fn_pid&order_type=d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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