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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가특별한교육 May 24. 2023

인신매매 척결 영웅, 작은학교 목공 선생님 되다

인터뷰 - 김종철 변호사

난민, 인신매매 피해자 등 취약한 이주민과 외국인들을 지원하는 ‘공익법센터 어필(APIL)’의 설립자 김종철 변호사.
그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국무부에서 ‘2018 인신매매 보고서 영웅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이제 변호사로서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자신의 인생에서 시즌2를 준비하고 있다. 그 길목에서 바닷가 작은 학교 아이들을 만나, 함께 나무를 자르고 다듬으며 만들어간 ‘코알라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인권 변호사인신매매 척결 영웅농부아버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호사님을 묘사할 수 있을 텐데요스스로 자신을 소개한다면요?


A. 저는 그런 여러 가지 자기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게 되게 좋더라고요. 우리가 보통 한 가지 정체성으로 자기를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다른 것들을 좀 소홀히 하기 쉬운데 누구나 다 아버지면서 남편이면서 자식이면서 시민이면서 또 직장인이기도 하고요. 각각의 역할에 걸맞게 잘 사는 게 중요하고 한 가지 역할이 다른 역할을 잠식시키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요즘에 저는 변호사이기도 하고, 목공 선생님이기도 하고, 농부이기도 합니다. 사실 지금 농사를 지은 지가 1-2년밖에 안 되기 때문에 농부라고 하기에는 좀 부끄럽죠. 왜냐하면 농사를 수십 년씩 한 분들이 많잖아요. 농부가 되고 싶은 사람이고 거기에 더해서 목공 선생님이라는 건 저에게는 뭐랄까 굉장히 낭만적인 일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제안을 받았을 때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바닷가에 있는 작은 학교의 목공 선생님이라니 너무너무 낭만적이잖아요. 그래서 ‘이거는 무조건 해야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Q. 제안을 받고 너무 기분 좋은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셨다고 했잖아요막상 경험을 해 보니까 어떠셨어요?


A. 처음에 제 아내한테 그랬어요. “이거 너무 낭만적인 일이다. 그래서 꼭 하고 싶은데 근데 애들이랑 같이 실제 해보면 아니겠지? 이 낭만이 깨지겠지?”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고 10번 정도 오는 동안 항상 이 시간이 좀 기다려졌어요. 그리고 아이들도 너무 사랑스럽고 이번에는 아이들이 이걸 어떻게 따라오고 또 어떻게 구현해낼까 생각이 들고 굉장히 기다려지는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로맨틱한 상상이 무너지지 않는 시간을 보냈어요.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학생이나 장면이 있나요?


A. 음…오늘 예를 들자면 ○○가 자기는 건축가가 되고 싶은데 집에서는 블록만 가지고 놀다가 학교에서 톱질도 하고 실제로 목공을 해서 좋았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얘기가 좀 좋았어요.

양양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열심히 목공을 가르쳐주는 김종철 변호사


Q. 변호사님 어린 시절은 어떤 아이였는지 궁금해요.


A.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면 평범하기도 하고 말썽도 많이 피우고 좀 주의가 산만한 아이였어요. 그래서 생활 통지표에 보면 항상 ‘주의가 산만하다’ 그런 내용이 빠지지 않고요. 어머니가 참 너무 창피하다고 하셨어요. 같은 학교 선생님이셨거든요. 애들이 다 체조할 때 같은 동작을 하는데 넌 다른 동작하고 있고 항상 줄도 좀 삐뚤게 서 있다고, 항상 주의가 산만하다고 그런 말씀도 하시고요.(웃음) 


  중학교 때는 좀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공부도 또 되게 못 했어요. 그때는 인문계와 실업계로 나눠져 있는데 선생님께서 인문계 갈 수 있겠냐 그렇게 얘기할 정도로 공부도 관심이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딱히 내가 잘하는 걸 찾아서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요. 중학교는 그렇게 보냈던 것 같고요.


  요즘 아이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뭔가 심심할 겨를이 없잖아요. 핸드폰도 있고 게임기도 있고 주변에 뭐가 많으니까요. 저는 어렸을 때 되게 심심하고 무료해지고 그래서 그냥 길가에 있는 코스모스 발로 톡톡 치고 다니고 그런 게 많았거든요. 되게 심심한데 오늘 뭐 하고 놀지 뭐 할 것도 별로 없네. 놀이를 찾아서 좀 재밌게 해볼까 이런 시절들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심심한 시절이 되게 좋았어요. 


Q. 싸움도 하고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학생이 지금의 길로 들어서게 된 어떤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으셨어요?


A.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고등학교 가니 주변 친구들이 공부를 하더라고요. 중학교 때는 살아남아야 하는 정글이었는데 고등학교는 좀 분위기가 다르더라고요.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어떤 변호사가 될까 하는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좀 좋은 일을 하는 변호사가 되면 좋겠다는 그런 막연한 생각만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연수원에 다닐 때 우연히 난민 지원하는 NGO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됐어요. 거기서  처음 난민을 만난 거예요.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좀 여태까지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왔는데 이 난민들은 되게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고 모험으로 가득 찬 용기 있는 선택을 해왔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너무 내 삶하고 비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런 난민들을 지원해서 그들의 이야기가 좀 해피엔딩으로 가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그때 난민 지원하는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제가 사법시험을 오래 준비했어요. 많이 떨어져서 이제 마지막으로 시험을 치고 더 이상 안 치겠다 마음먹고 양양에 라브리(L'Abri)라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을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나서 12월에 발표가 났는데 제 예상과는 달리 합격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양양이 너무 좋고 이 시골 생활이 너무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래서 사법연수원 들어가는 것을 2년 연기하고 거기서 일하다가 돌아가게 된 거예요. 


지금 되돌아보면 여태까지 남들이 기대하는 인생을 살아왔는데 이제는 좀 내가 원하는 인생, 그리고 좀 흥미롭고 모험 같은 선택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첫 번째 일탈을 한 것이 그 라브리에서의 생활이에요. 바로 돌아가지 않고 2년 동안 거기서 지내며 한 번 일탈을 하고 나니까 그 뒤에 일탈들은 그렇게 어렵지가 않더라고요.


  2011년부터는 난민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를 세웠거든요. 비영리단체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기부로 단체를 운영하는 거잖아요. 처음에는 변호사가 우리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기부로 살아갈 수 있는 건가 그런 고민이 많이 들었어요. 일단 단체를 세워서 시작하고부터는 그런 고민은 안 들더라고요. 응원해 주는 사람도 많고 후원자들도 많이 생겨서 그냥 아무 걱정 없이 지난 12년을 일했는데 이제 그만두고 또 다른 실험을 하려고 하는 과도기예요.



2012년 6월, 외국인 노동자 인권침해와 임금체불에 항의하는 규탄 기자회견


Q. 난민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다른 나라에 대한 반감,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무엇인가를 가져간다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는 것 같아요.


A. 저도 일을 하면서 느낀 게 우리 안에 인종주의, 인종 차별 이런 게 엄청나게 뿌리 깊은 거예요. 물론 저도 그런 게 있겠죠. 굉장히 뿌리 깊고 그게 정서적인 것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것도 있어서 서로 막 강화하면서 진화를 해왔단 말이죠. 그럴수록 학교 교육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떻게 사람들이 환대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게 참 어렵긴 한데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하는 건 되게 잘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어느 나라에 되게 절박한 상황에 있는 우리가 잘 모르는 누구를 지원한다든지 그런 거는 모금도 엄청나게 많이 돼요. 그런 따뜻한 마음은 있는데 이주민들, 난민들이 나도 사람이고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릴 권리를 내가 누려야 한다고 하면 그때는 되게 반감이 드는 거예요. 


  시혜 대상이 갑자기 권리의 주체가 돼 버리면 네가 뭔데 그 권리 주장을 나랑 똑같이 하려고 하느냐 이렇게 돼버리거든요. 그게 흔히 말하는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 그런 거랑도 연결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누가 우리 사회가 철저히 능력주의 사회라고 했는데 저는 되게 그 말이 공감이 되고 그 능력주의가 국적하고도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그랬잖아요. 부모를 잘 만난 것도 능력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우리 사회를 잘 표현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국적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내가 한국 국적자로서 이거 누리는 건 당연한데 너는 한국 국적자도 아니면서 왜 나랑 똑같은 그런 권리 주장을 하려고 하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거거든요. 자격을 가지고 문제 삼는 거죠. 


  우리가 한국 국적자로 태어난 게 그게 우리가 애써서 된 게 하나도 없잖아요. 우리가 38도 위쪽에서 태어나지 않고 아래쪽에서 태어난 거에 스스로가 기여한 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 건데 일종의 선물로 받은 거거든요. 그렇게 봐야 하는 건데 그렇지 않고 이거를 대단한 자격으로 생각을 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Q.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는데요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도적으로 혹은 선생님들이 교육적으로 힘써야 할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지점은 뭔가요?


A. 제가 난민 지원하는 변호사 일을 해오면서 제일 좋았던 점이, 예멘 난민 왔을 때 난민 혐오하는 시위도 있고 그랬잖아요. 만약에 난민 변호사 안 했으면 나도 저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일을 하길 너무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일종의 학습을 한 것인데 이 학습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운 거예요. 모르기 때문에 포비아가 생기는 거잖아요. 제노포비아도 그렇고 호모포비아도 그렇고 결국은 상대에 대해 모르기 때문인데 옆에 그 사람이 함께 있다 보면 그냥 우리랑 같은 사람이구나 이렇게 되거든요.  


  난민에 대한 집단별 인식에 관한 통계를 보면 의외로 40대의 블루 컬러들이 제일 열려 있어요. 왜냐면 이 사람들은 이주 노동자랑 같이 일을 해봤거든요. 30대, 20대 화이트 컬러가 제일 부정적이에요. 그냥 TV로만 봤지 근처에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많이 접하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단순히 어떤 시혜의 대상 아니면 불쌍한 대상이라는 생각을 넘어서, 우리가 사람들을 제일 잘 환대하는 방식은 그 사람들을 우리의 스승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의미냐면 저도 이제 이주민들이랑 난민이랑 일하면서 그런 걸 많이 배우게 됐는데, 아무도 우리 사회의 테두리를 초월하여 우리 스스로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우리는 우리 사회에 속해서만 사회를 볼 수 있는 한계가 분명히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한계를 극복해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이 우리나라에, 내 곁에 와서 나를 깨우쳐주는 거거든요. 이게 전부가 아니구나, 이게 전부가 아니고 내가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눈이랄까 그런 역할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주민을 우리가 단순히 그냥 어떤 시혜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정적인 생각을 강화할 수도 있어요. 그 사람들을 우리 스승으로 초청해서 그들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로 이야기를 듣는 게 저는 무척 중요한 것 같아요.


Q. 하신 말씀 중에 나는 다른 사람한테 어떤 선물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는 말이 되게 좀 감명 깊었어요그 길을 걸어오는데 행복하고 좋은 기억도 당연히 많으셨겠죠근데 막 힘들 때도 있잖아요그리고 뭔가 해결이 안 되는 것 같고 막막하고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 극복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A. 극복 비결은 없고 그냥 줄타기 하는 것 같아요. 그냥 뭔가 끝이 없다. 해결책이 안 보인다. 그럴 때는 그냥 나는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내가 할 만큼 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계속 고민하면서 ‘그래도 해야지 뭐 할 수 있는 거 해야지’ 하면서요.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결과가 나오면 너무 좋겠죠. 근데 한편으로는 문제가 또 다시 생겨서 도돌이표로 갈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나는 어떡하지. 진짜 진짜 끝도 없구나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런 생각하면서도 또 할 것 같긴 해요. 

  스트링 펠로우즈라는 미국 변호사의 책을 작년 말에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할렘에서 일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변호사로서 온갖 정말 힘든 일들이 다 있었을 거 아니에요. 나 같으면 정말 진작에 나가 떨어질 것 같은데,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람들을 정말 그냥 무심하게 묵묵하게 그냥 계속 지원을 하더라고요. 이 사람을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니까 힘든 상황에서도 그의 이야기가 떠오르더라고요.



Q. 이렇게 마음을 쏟으면서 어필(공익법센터 APIL)이라는 단체를 10년 넘게 운영하셨는데 굉장히 긴 시간이잖아요최근에 관두셨다고 들었는데 이유는 무엇인지또 다른 계획이 있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요.


A. ‘너무 늦기 전에 다른 것도 좀 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컸어요. 어느 날 노안이 왔다고 느꼈는데, 근시에 난시까지 있어서 가까운 것도 안 보이고 글도 안 보이고 다 그렇죠. 안경이 3개가 필요해요. 먼 거 보는 거, 가까운 거 보는 거, 중간에 보는 거. 엄청 불편하죠. 


  처음에는 좀 우울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러면 내가 이제 더 늦기 전에 뭔가 시즌 2를 해야겠다. 시즌 2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뭔가 기존에 해왔던 것과 다른 것, 아니면 기존에 하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일단은 퇴사를 했어요. 그리고 어필이라는 단체도 제가 설립자로서 12년 일했으니까 거기도 이제 시즌 2를 해야 되고, 설립자가 계속 있는 것도 사실은 그곳이 진화를 하는 데 있어서 좀 안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만뒀죠.


Q. 그래도 그만두신 덕분에 저희는 코알라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네요

요즘 학력 이야기가 많이 나오다 보니까, 목공같은 것은 수업 진도에 방해만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이렇게 직접 가르쳐 보시고 나서 든 생각이나 느낌이 있으실까요.


A. 제가 경험이 짧기 때문에 여기서 깊게 얘기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도 대한민국 교육을 여태까지 받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는 뭐랄까, 학교 때 배운 인지 교육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순 없고, 그게 음으로 양으로 저한테 도움이 되겠죠.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데 도움이 되든지, 아니면 영어 문서를 읽는데 도움이 되겠죠? 잘 모르겠네요(웃음) 


  예전에 환생교(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전국 교사 모임) 선생님들이랑 새를 보러 다닌 적이 있어요. 우리 동네에 환생교 선생님이 있어서 같이 따라가게 된 거거든요. 거기는 사람들이 안 다니는 지역이니까 새들이 많단 말이에요. 두루미도 있고 독수리도 있고 온갖 멸종위기 조류가 다 있어요. 그런데 한 선생님이 새 소리를 듣고 무슨 새인지 다 알아맞혀요. 100% 알아맞혀요. 제가 그걸 보면서 저런 걸 학교에서 배웠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리고 또 환생교 선생님 중에 또 숲 같은 데 가면 나무든 풀이든 다 아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소나무 참나무밖에 모르는데 그분들은 다 아는 거예요. 


  저런 게 진짜 지식인데 나는 뭘 배웠던 건가 그런 생각이 들고… 나이가 들다 보니까 ‘가장 중요한 노후 대비는 이야기를 모으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Q. 프레드릭처럼요?

(편집자 주: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주인공.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는 들쥐)


A. 그러네요. 지금 딱 프레드릭이 생각나네요. 이야기를 모으는 것. 그러니까 좋은 소설들을 쟁여놓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그걸 다시 들여다보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그런데 좋은 소설을 자기가 모을 수 있으려면 문학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고 안목이 있어야 되는데 결국 국어 시간에 가르쳐야 하는 게 이런 거 아닐까… 문학을 사랑하고 이야기를 모을 수 있는 그런 역량을 가르쳐주는 것이 결국 국어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요즘은 사람들이 요리를 잘 안 하는데 저는 어렸을 때 좋은 기억들은 전부 요리랑 연결되어 있거든요. 고추장 만들고, 고추 따서 말리고, 멸치 똥 따서 뭐 하고 이런 좋은 기억들은 전부 음식과 관련된 기억이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들도 이제 거의 요리를 안 하잖아요. 사실 먹는 건 굉장히 중요하고 우리가 뭘 먹느냐에 따라 어떻게 농사 짓는지 결정이 되고 어떻게 농사 짓는지가 결국 환경이랑 또 연결이 되거든요. 그래서 먹는 건 너무 중요한데 다 사 먹고 그러니까... 우리 시대가 먹을 거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은데 어느 시대 때보다 음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학교에서 가르쳐줘야 할지 아니면 집에서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음식이라든지 또 문학이라든지 아까 말한 새, 나무나 이런 자연 같은 것들이 다 사실은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지식이고 그런 의미에서 목공도 마찬가지인 거죠. 결국 목공의 취지는 자기가 원하는 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드는 거잖아요. 


  제가 아마추어 목공을 하면서 가장 좋은 건 뭐냐면 자기가 디자인해서 결과까지 딱 보이니까 엄청 성취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다 어떻게 열매로 이어질지 눈에 볼 수가 없잖아요. 여러 사람들이 같이 하고 결국은 너무나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과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안 미치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리고 목공은 몸과 머리를 동시에 쓸 수 있는 일종의 놀이이기도 합니다. 저는 목공이 굉장히 아이들한테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길게 말씀드렸는데 인지 교육도 중요하지만 학교에서 그런 것들을 함께 애들이 배워야 하지 않겠나 생각해요. 커서도 이렇게 행복한 기억들을 끄집어내서 곱씹고 하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고요.


A. 이런 얘기를 할 때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들은 어찌 되었든 나중에 도움이 되는 걸 해야지 그건 순진한 소리다이상적인 소리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잖아요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잘 살고 있는 어른들이 많아야 그런 이야기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 저는 학창 시절을 그렇게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그런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런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서 어떨까 저도 궁금해요. 성공의 기준을 무슨 대학을 가고 어떤 직장을 가고 그런 게 아니라, ‘어떻게 자기 삶을 잘 살고 있는가’ 그런 측면에서 한번 보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목공을 가르쳤던 시간은, 저한테는 가장 로맨틱한 경험이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3개월 동안 아이들이랑 정말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모두가 특별한 교육 매거진 목차

여는 글_모두가 특별한 교육 창간호
1. 시론
2. 특집
3. 학교이야기
4. 인터뷰
5. 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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