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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시러브 May 03. 2024

삼촌의 첫사랑(1)


책으로 가득 찬 공간. 수많은 세상과 연결되는 곳.

도서관이다. 몇 시간 동안 책 속의 세계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이나는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가 갑자기 쏴 하는 소리에 창밖을 보니 비가 거세게 쏟아지고 있다. 부르르르. 재킷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린다. 이나는 복도로 나가며 전화를 받는다.


"응 삼촌."

"우산 안 가져갔지? 삼촌 지금 나가."

도서관에도 남는 우산이 있지만, 말해도 소용없단 걸 알기에 알았다고 대답한다. 우산이 있어도 삼촌은 데리러 올 테니까. 비 오는 날이면 삼촌은 이나가 어디에 있든 늘 데리러 왔다. 그날 이후로.


일을 다 마치고 나서는데, 때맞춰 삼촌이 왔다.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해 주시는 어머님 한 분이 삼촌에게 말한다. "아이구 이번에도 어김없이 오셨네. 아무리 조카가 예뻐도 그렇지. 그 훤칠한 인물로 어째 조카만 쫓아다니고 그래. 내가 아는 집 딸이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데, 얼굴도 참하고 성격도 좋아. 어떻게, 한 번 만나볼래?"

"하핫 아닙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몇 번째 거절일까? 삼촌을 보는 사람마다 여자를 소개해주지 못해 안달이다. 저렇게 매번 거절하는 것도 피곤할 것 같은데. 삼촌은 늘 살갑게 웃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예의 있게 거절한다.


얼마 전의 일이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집 앞까지 찾아와서 삼촌에게 고백을 했다. 삼촌의 굳건한 거절에 바로 울면서 돌아갔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잘생긴 외모와 다정한 성격은 많은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그 눈웃음 공격에 쓰러진 여자만 몇 명인가. 그래서인지  삼촌이 운영하는 킥복싱 학원은 여자들이 끊임없이 등록을 한다.


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여자를 떠올린다. 그날 밤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지금쯤 삼촌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15년 전. 삼촌이 3년 동안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조카밖에 모르던 삼촌에게 찾아온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윤수진. 하얗고 예쁜 얼굴에 여리여리하지만 내면이 건강하고 단단한 외유내강의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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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그날 밤 캄캄한 골목길. 수진은 야근 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와 자신의 발소리 외에 다른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그녀를 쫓아가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계속 쫓아오는 걸 느낀 그녀는,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슬쩍 봤다. 검은 모자를 쓴 남성이다. 비가 오는 데다가 우산까지 쓰고 있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는다. 잠시 걸음을 멈추자 남자도 같이 멈춘다. 다시 걸었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계속 따라온다. 겁이 난 그녀는 뛰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땅을 달리느라 찰박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 비슷한 소리가 뒤에서도 들려온다. 그 남자도 뛰고 있는 것이다. 순간 소름이 쫙 돋는 게 느껴진다. 달리면서 휴대폰을 꺼내 도혁에게 전화를 건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무언가가 훅 덮쳐왔다. 휴대폰을 떨어뜨린 채 그에게 질질 끌려간다.


떨어진 휴대폰 위로 굵은 빗방울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화면에는 '내 사랑 도혁 씨'가 떠 있다.

"수진 씨! 왜 말을 안 해요? 무슨 일 있어요?! 대답 좀 해봐요 수진 씨!!"

애처로운 도혁의 음성만 울릴 뿐이다.


다시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도혁은, 즉시 여자친구의 집으로 달려왔다. 쾅쾅 두드리지만 조용하다. 불도 꺼져 있고 인기척이 전혀 없다. 우산도 쓰지 않아 온몸이 비에 젖은 채로 동네를 샅샅이 뒤진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그가 걸음을 멈춘다. 여자가 바닥에 누워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피를 흥건히 쏟은 채로 차갑게 누워 있는 수진이었다.

괴한이 비어 있는 건물로 끌고 갔을 때 그녀는 겨우 도망쳐 옥상까지 올라가지만, 그놈이 바로 따라왔다. 그놈에게서 벗어나려고 거세게 몸부림치다가 옥상에서 떨어진 것이다.


도혁은 쓰러진 수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목에 손을 가져가 대보고 가슴에도 얼굴을 대 보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으아아아악"

어두운 밤 온 동네에 도혁의 처절한 절규가 퍼진다.

결국 범인은 잡혔지만, 도혁의 들끓는 분노는 식을 줄 모른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슬픔은 도혁의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말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수진을 따라서 죽을까, 생각한다. 이제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눈에 핏발이 서서 빨갛게 된 채로 멍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때 똑똑, 소리가 들리더니 이나와 이한이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온다. "삼촌, 여기." 두 아이가 삼촌 무릎 위에 편지를 살포시 올려놓았다.


"삼촌, 죽지 마."

그 말을 겨우 입 밖으로 내뱉으며 남매는 주저앉아 통곡을 한다. 삼촌은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삼촌이 처음으로 약해 보였다. 늘 웃으며 다정했던 삼촌이 웃지도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니. 무서웠다. 저러다 죽을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들을 안아주고 싶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나의 아빠가 들어와서 양쪽 팔에 한 명씩 들어 올려 방에서 나갔다.


조용히 편지를 열어보는 그의 손.

그리고 천천히 읽어본다. 편지에는 '삼촌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곳곳에 번진 눈물의 흔적들을 보며 아이들이 얼마나 눈물을 쏟아내며 썼을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작은 손으로 온 마음을 다해 썼을 조카들을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하는 듯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비처럼 쏟아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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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는 그날 밤 아이처럼 울던 삼촌을 떠올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삼촌이 보지 못하게 얼른 눈물을 감춘다. 이나는 강하다. 20살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으로 가던 길에 괴한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거뜬히 패주고 경찰에 신고했던 그녀다. 도혁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비 오는 날이면 자신이 직접 이나를 데리러 가야 마음이 편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수진 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있다. 이나와 이한, 그들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그다.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그때.

이나에게 카톡이 왔다.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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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금요일에 연재할,

'삼촌의 첫사랑(2)'에서 이어집니다.

즐거운 금요일 보내시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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