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가 말했던가. 가장 끔찍한 고통은 자기 스스로에게 가하는 고통이라고. 도혁은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벌을 내렸다. 다시는 사랑을 할 자격이 없는 놈이라고.
그는 지금 화사하게 핀 벚꽃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슬픔에 젖은 눈으로. 벚꽃이 활발하게 피어나는 시기만 되면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데. 그는 괴로움에 갇힌다. 그녀가 더 애잔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벚꽃은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었으므로.
사서 일을 끝내고 도서관에서 나오던 이나가 그를 발견하고 뛰어갔다.
"삼촌! 나 기다린 거야?"
"응. 같이 들어갈까 해서."
사진을 급히 지갑에 넣으며 애써 미소 짓는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이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알고 있었다. 그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흩날리는 벚꽃잎이 어쩐지 그의 눈물처럼 슬프게 보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삼촌의 눈물을 봤던 그날을 떠올렸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삼촌은 지금쯤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15년 전. 도혁에게는 3년 동안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에게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해 준 유일한 여성이었다. 조카밖에 모르고 살던 그에게 찾아온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하얗고 예쁜 얼굴에 여리여리하지만 내면이 건강하고 강한 외유내강의 여자였다.
사랑은 인생을 아름답게 한다.
벚꽃이 흩날리던 날, 한강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던 그들은 서로를 강렬하게 사랑했다. 세상이 온통 사랑의 빛으로 가득했던 시절이다. 그때는 몰랐다. 서로를 잃게 될 운명에 처할 줄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늦은 밤 캄캄한 골목길. 수진은 야근 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와 자신의 발소리 외에 다른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가 그녀를 쫓아가고 있었다. 뒤에서 계속 누군가가 쫓아오는 게 느껴진 그녀는,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몰래 뒤를 슬쩍 봤다.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옷을 입은 남성이었다. 비가 오는 데다가 우산을 쓰고 있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자 남자도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다시 걸었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땅을 달리느라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똑같은 소리가 뒤에서도 들려왔다. 순간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게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도혁에게 전화를 거는 동시에 뒤에서 무언가가 훅 덮쳐왔다. 바닥에 휴대폰을 떨어뜨린 채 그에게 질질 끌려갔다.
떨어진 휴대폰 위로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화면에는 '내 사랑 도혁 씨'가 떠 있다.
"수진 씨? 왜 말이 없어요? 수진 씨! 대답 좀 해봐요 수진 씨!!"
애처로운 도혁의 음성만 들려올 뿐이다.
다시 걸어보지만 받질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도혁은 즉시 그녀가 사는 동네로 죽을힘을 다해 뛰어갔다. 우산도 쓰지 않고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어떤 형체가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바닥에 누워 있다. 수진이다. 그녀가 바닥에 차갑게 누워 있다. 숨을 쉬지 않았다. 따뜻했던 그녀의 몸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흥건한 피가 빗물에 섞여 붉은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그 웅덩이 위에는 떨어진 벚꽃잎이 처절하게 둥둥 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그는 절규했다.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오랫동안 울부짖었다. 어두운 밤 도혁의 피맺힌 절규가 온 동네를 뒤집을 듯이 외롭게 울려 퍼졌다.
괴한이 어떤 건물로 끌고 갔을 때 그녀는 겨우 도망쳐 옥상으로 올라갔지만, 바로 뒤쫓아온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거세게 몸부림치다가 결국 옥상에서 떨어졌다.
범인은 금방 잡혔다. 수진의 직장 동료였다. 그녀를 몰래 짝사랑하던 그가 수진의 매몰찬 거절에 분노하고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범인이 잡힘으로써 사건은 종료됐다. 도혁의 사랑도 종료됐고, 그의 인생까지 종료된 기분이었다. 분노는 식을 줄을 몰랐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다. 그녀의 뒤를 따라갈까, 생각도 했다. 그녀의 장례식을 치른 후 그는 세상을 포기한 사람처럼 무기력해졌다. 말도 하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지 나흘 째 되던 날.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는 걸까. 이제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똑똑. 이나와 이한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삼촌, 이거."
두 아이가 눈에 눈물이 가득 맺힌 채로, 그러나 흐르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억누르는 얼굴로 편지를 내밀었다. 그가 아무런 대꾸도 없고 미동도 없자, 그의 무릎 위에 두 개의 편지를 올려놓으며 힘겹게 한 마디 내뱉었다.
"삼촌. 죽지 마."
남매는 갑자기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도혁은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약해 보였다. 늘 강하고 늘 다정했던 삼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안에만 갇혀 있다니. 무서웠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있으니. 그러다 삼촌이 죽을까 봐 걱정이 됐다. 남매에게는 큰 공포였으며 시련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얼른 다가와 아이들을 안아줬겠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마지못해 이나의 아빠가 들어와서 양팔로 아이들을 들어 올려 방에서 나갔다.
그렇게 굳은 채로 또 한참이 흘렀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던 그의 시야에 갑자기 스쳐가는 이미지가 있었다. 이나와 이한의 웃는 얼굴이다. "삼촌!" 하고 부르며 달려와 안기는 사랑스러운 조카들. 그제야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편지에 시선이 갔다. 조심스럽게 남매의 편지를 열어 보았다. 편지 안에는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부터 중학교 입학식부터 생일날 같이 가기로 했던 놀이공원, 매일 울면서 밥도 먹지 않겠다는 귀여운 협박까지. 다양했다.
곳곳에 번진 눈물의 흔적들을 보며 마음이 아릿해졌다. 그 작은 손으로 온 마음을 다해 썼을 조카들을 생각하니 그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더 이상 쏟아낼 눈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나는 그날 밤 아이처럼 울던 삼촌을 떠올리다가 자신도 모르고 울컥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삼촌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도혁이 보지 못하게 얼른 눈물을 감췄다.
"배고프다. 얼른 가자 삼촌."
"배 많이 고파? 요 앞에서 떡볶이 하나만 먹고 갈까?"
"너무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