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향기로운 어느 봄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하나가 반짝거리고 있다. 이른 봄이라 아직은 제법 쌀쌀하다. 이나는 손을 재킷 속에 집어넣은 채 길옆으로 화사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노란 개나리꽃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봄이 오니 곳곳에 생기가 넘친다. 올해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20대 끝자락인 그녀는 연애를 하지 못한 지 5년이 넘었다. 은은한 꽃향기에 싸여 있어서일까. 왠지 올해는 어느 해보다 생명력 넘치는 한 해를 보낼 것 같은 화사한 예감이 밀려온다.
몽롱한 기분을 확 깨트리는 장면과 맞닥뜨렸다.
저 멀리 보이는 편의점 앞에서 교복 입은 중학생 무리가 한 남성을 골목으로 억지로 끌고 가는 장면이었다.
골목으로 가까이 갈수록 뺨 때리는 소리와 함께 중학생들의 말이 자세히 들렸다.
"그러니까 왜 말을 안 들어! 새끼야!"
"담배 하나 사 오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 학교 다닐 때 빵셔틀 해봤을 거 아냐?"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한 남학생이 묵직하게 한 마디 뱉었다.
"꿇어."
남자는 당황했다. 옆에 있던 친구 녀석들도 당황한 눈치다. 다시 한번 강조하며 천천히 말했다.
"무릎 꿇으라고."
이나가 골목 앞에 섰을 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5명의 중학생 무리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광경이었다. "이야. 요즘 애들 살벌하네." 그녀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뭐야 저 여자는. 니 여친이냐?"
한 학생이 남자를 보며 물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대답을 가로챘다.
"야. 저 꼴에 여친이란 게 있겠냐?"
저들끼리 키득거리고 있을 때 이나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곤 한 명씩 팔을 잡아 꺾으며 다리를 걸어 자빠뜨렸다. 마네킹을 넘어트리듯 한 명씩 차례차례. 그녀의 가벼워 보이는 몸짓과는 다르게 타격감이 매우 컸는지 아이들은 금방 일어나지 못하고 바닥에 붙어 있었다.
"뭐가 이렇게 가벼워. 밥 좀 많이 먹고 다녀라 얘들아."
이어서 30대 남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경찰 불러드려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던 그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이내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더니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급히 도망을 쳤다. 억울함보다 수치심이 더 컸으리라. 그의 행동이 씁쓸하긴 했으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나는 중학생 5명을 나란히 세워 사진을 찍어두며 따끔하게 으름장을 놓고 돌아섰다.
집에 도착했을 땐 각자 운동기구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거실은 가히 헬스장을 방불케 한다. 그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도혁이다. 그 거대한 근육으로 바벨을 가볍게 들어 올릴 때마다 근육들이 씰룩씰룩 춤을 췄다. 킥복싱 학원을 운영하는 그는 낮에도 운동을 하고 밤에도 운동을 한다. 그의 지치지 않는 체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키도 크지만 근육량이 많아 체중도 많이 나간다. 40대 초반이지만 아직은 30대로 보이는 그는, 훤칠한 외모까지 갖춰 많은 여자들이 따른다. 하지만 아직 미혼이다. 그에게는 운동이 제일 좋고, 조카들을 끔찍이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조카들과 함께 운동할 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에게 가족과 운동은 유일한 삶의 버팀목이었다.
그의 가슴팍에 안겨 보는 게 소원인 여자들이 줄을 서 있는데 말이다. 부동산 여사장님부터 카페 알바생들, 옆집에 사는 30대 여성 등. 수많은 여성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큰 키, 거대한 근육, 잘생긴 얼굴, 다정한 미소. 그야말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모두 갖춘 남자랄까. 그가 지나갈 때면 많은 여성들이 사랑에 빠진 눈길로 그를 쫓는다.
이나 역시 삼촌을 사랑하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그가 다시 사랑을 하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 가족 중 누구도 도혁의 연애나 결혼에 대한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것은 도혁을 절망과 나락의 길로 떨어졌던 때로 보내버리는 일과 다름없었으니까. 어떤 기억은 꺼내어보기조차 두려울 정도로 잔혹하다. 시간이 모든 걸 치유해 준다는 말이 있는데. 도혁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로 도혁은 마음의 빗장을 잠가버렸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늘 밤은 다 같이 한강을 달려볼까?"
준호의 제안으로 집에서부터 한강대교를 달렸다. 아름다운 한강을 배경으로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느긋하게 러닝을 하는데, 맨 앞을 달리던 이한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리 위에 아찔하게 걸터앉아 있는 교복 입은 남학생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안 돼!!"
이한이 빠르게 남학생이 있던 지점에 도착했으나, 그 직전에 아래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아니, 빠진 게 아니다. 본인의 의지로 한강에 몸을 던진 것이다. 대체 왜, 암흑 속으로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던져버렸을까. 무엇이 그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이한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한강으로 따라 들어갔다. 뒤따라온 네 사람은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걱정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이한은 한때 수영 선수를 했을 정도로 수영을 잘하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실력이다. 곧 수면 위로 이한과 남학생의 얼굴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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