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에 순대에 어묵까지 먹은 이나와 도혁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들처럼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여느 때처럼 거실에서 근력 운동을 맹렬히 한 뒤 밤운동을 나섰다.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달리는 기분은 언제나 짜릿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낯선 골목 앞이었다. 얼마 전까지 신축빌라 공사가 한창이었던 곳이다. 신축빌라가 쭉 늘어서 있는 그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아직 다 들어오지 않았는지 듬성듬성 불이 켜져 있었다.
"꺅!"
골목 깊숙한 곳까지 찍고 돌아서는데, 어디선가 여자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몇 블록 앞에서 맨발의 여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뒤를 따라온 곰처럼 큰 체격의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로 질질 끌고 갔다.
"어딜!"
이나는 얼른 달려가 발차기로 남자를 여자에게서 떨어뜨렸다. 운동선수일까. 보통은 이나의 발차기 한 방에 쓰러지고 말지만 그는 달랐다. 근육의 양이 도혁 못지않게 비대한 이 남자는 잠시 휘청이긴 했으나 금세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욕설을 내뱉으며 이나에게 달려드는 남자에게 도혁이 달려들었다. 마치 쾅 소리가 나는 듯한 격렬한 부딪힘이었다. 그 부딪힘은 생각보다 시시하게 끝났다. 도혁의 빠르고 강력한 주먹 한 방에 남자는 뒤로 쓰러져 버렸다. 도혁에게 뻗치던 팔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주먹질 몇 차례는 주고받을 줄 알았는데. 이나는 내심 아쉬웠다.
"괜찮아요?"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을 벗어 여자에게 덮어주며 이나가 물었다.
"고.. 고맙습니다."
처참한 몰골을 한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하얀 원피스는 다 찢겨 있었고, 구멍 난 옷 사이사이로 시커먼 멍이 보였으며, 얼굴은 맞아서 퉁퉁 부어 있었다. 이나가 그녀를 챙기는 동안 도혁은 경찰에게 신고를 했다.
"사흘간 남자친구 집에 감금되어 있었어요. 손과 발이 묶인 채로요. 휴대폰으로 이성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저를 죽일 듯이 때렸어요. 끔찍했어요.."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겁에 질려 있는 눈동자로 공포에 사로잡힌 사흘의 시간이 보이는 듯했다. 남자는 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했다. 진실이 아니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의심을 일삼던 그는 결국 그녀를 감금하고 폭행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불결한 소유욕에 불과하다. 불결한 집착에 불과하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두 명의 경찰이 도착했다. 한 명은 그때 그 젊은 경찰이다. 상황을 수습한 후 떠나기 전 이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번이 두 번째네요."
"네. 그렇네요."
"다음에 또 만나면 '히어로'라고 불러 드려야 될 것 같아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가 말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나는 왠지 모르게 수줍어졌다. '히어로'라는 단어 때문이 아니다. 그의 관심이 괜스레 기분 좋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이지만, 실은 첫 만남부터 그에게 끌렸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게 이렇게 빨리, 그리고 아주 짧게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떠나는 경찰차를 바라보며 이나의 마음에는 경보음이 울렸다. 사랑에 잘 빠지지 않는 그녀는 한 번 빠지면 속수무책이다. 아직 안 돼. 여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결혼을 일찍 했을지도 모르고.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어. 알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세 번째 만남이 빨리 찾아오길 염원하고 있었다.
다음 날, 출근하기 위해 대문을 나서는 도혁 앞으로 누군가가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옆집에 사는 우희였다.
"이게 뭐예요?"
도혁은 얼떨결에 상자를 건네받으며 물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만든 쿠키예요. 제가 요즘 베이킹에 관심이 많거든요. 너무 많이 만들어서 나눠 먹으면 좋을 것 같아 가져왔어요."
거짓말이다. 오롯이 도혁을 위해 만든 쿠키였다. 그와 마주치기 위해 일찌감치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그에게 선물하는 거라고 하면 받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치밀하게 계획해야만 했다.
"감사합니다. 식구들과 같이 맛있게 먹을게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봤다.
벌써 3년이 지났다. 그녀가 도혁을 사랑한 지도.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눈부신 미모의 그녀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넘치는 데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짝사랑 중이다. 짝사랑은 처음이다. 늘 인기가 넘쳤던 그녀는 짝사랑을 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사랑에 빠진 저 남자는 정작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말이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지만, 마음의 거리는 마치 북극과 남극의 거리처럼 느껴진달까. 그럼에도 단념이 되지 않았다. 사랑을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가 있겠는가. 그녀는 하얗게 핀 벚꽃나무 아래 서서 눈을 감고 기도했다. 봄의 마법이 자신에게도 찾아오기를.
도혁은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고 거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 뒤 밤운동을 나섰다. 오늘은 다들 천천히 밤산책을 나가겠다고 하여 혼자서 뛸 참이었다. 저 멀리서 여성의 그림자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이상하다. 분명 누군가 걸어오는 것 같았는데. 그는 수상쩍은 기분이 들 땐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들은 촉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발달한 걸까. 그쪽으로 가까이 갔을 때 이상한 기척이 들렸다. 건물 뒤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어떤 남자가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는 겁탈하고 있었다. 도혁은 여자에게서 얼른 남자를 떼어내더니 바닥으로 힘껏 내던졌다. 도망칠 수 없을 정도로.
"괜찮아요?"
너무 놀라서일까. 여자는 도혁의 얼굴을 보더니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우희였다. 늘 밝은 모습이었던 그녀가 울고 있었다. 순간 어떤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떠올리기도 고통스러운 수진의 마지막. 공포에 떨었을 수진을 상상하며 고통에 몸부림쳤던 기억도 같이 떠올랐다. 죽도록 사랑했던 여자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일까.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거친 분노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는 마치 제어 능력을 상실한 로봇처럼 쓰러져 있는 남자 위에 올라앉아 주먹으로 얼굴을 수차례 강타했다.
"삼촌 그만해!"
도혁을 뒤따라온 이나가 삼촌에게 소리쳤다. 이나의 목소리에 주먹을 멈추기는 했으나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오래된 분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뜩한 눈빛이었다. 범인의 얼굴은 알아보기가 어려운 지경이다. 이나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마터면 도혁은 과잉방어로 처벌을 받을 뻔했다.
인플루언서인 우희가 SNS에 피해 사실을 알리면서 일이 커졌고, 그 덕에 정당방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사실 범인은 전부터 우희를 스토킹 하고 있었다. 몰래 훔쳐보고, SNS로도 계속 지켜보면서. 범인의 집에서 그동안 그녀를 스토킹해온 증거들이 발견됐다. 강간 미수 혐의도 이번뿐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여성을 스토킹 하고 성폭행까지 한 전력이 몇 건 있었다. 죄질이 나쁜 범죄자로부터 피해자를 구해준 영웅을 처벌할 순 없다는 의견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 도혁은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고, 인기는 더 높아졌다. 그가 운영하는 킥복싱 학원에 등록하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이것이 인플루언서의 힘인가.
그러나 한 사람만은 그를 피해 다녔다.
우희다. 자신을 구해준 그가 처벌받지 않도록 있는 힘껏 도왔지만 그와 마주하는 건 두려웠다. 누구보다 그를 원했지만, 이제는 그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부끄러웠다.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켜버린 사람처럼.
'봄의 마법'은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