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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Jan 09. 2024

핸드드립 커피와 통밀빵은 맛있어

-여보, 나 오늘은 꼭 테라로사에 가야 할 것 같아.


아이의 방학식이 며칠 남지 않았다. 혼자서 카페를 즐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가족이 함께 오손도손(..) 카페 나들이를 즐겨도 되지만, 나는 혼자 있고 싶을 뿐이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사색을 즐기다가 오고 싶다. 이제 약 두 달간 그것을 못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금단증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아직 3일의 시간이 더 남았지만 꼭 오늘, 신랑이 쉬는 날이어야만 한다. 내가 걸어서 갈 수 있는 테라로사에는 맛있는 빵이 없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본점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테라로사 본점은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없을뿐더러 버스 노선은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 차를 타면 10분 밖에 안 걸리지만 나는 뚜벅이다. 택시비는 7천 원 정도가 나온단다. 왕복 14000원이다. 아무리 맛있는 커피와 빵이라지만 그건 좀 아닌듯싶다. 신랑 쉬는 날이 답이다. 다행히 신랑도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한다. 내가 가자고 한다면 무조건 데려다줄 것이다.



오랜만이다. 평소라면 카페 구석구석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녔을 텐데, 오늘은 얌전히 앉아 분위기를 눈에 담는다. (그래도 일기용 사진은 꼭 찍어 온다) 바깥 뷰는 없지만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의 모습과 주문을 하는 사람, 자리를 잡는 사람들의 모습 모두가 하나의 그림이다.


요즘은 워낙 대형카페가 많아서 규모에 놀랍지는 않지만, 테라로사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조금은 올드해 보이는 우드우드함.


-여기 맨날 와서 커피와 빵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가끔씩 와서 더 좋은 거야.


듣고 보니 신랑 말이 맞는 것 같다. 자주 갈 수 없으니 아쉽고 간절하다. 기다림 끝에 도착했을 때의 기쁨이란.



그래, 내가 이 빵 때문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어째서 본점에만 이렇게 맛있는 빵을 잔뜩 갖다 놓는단 말인가. 너무 억울(?) 하다. 그들의 마케팅이라고 해도 절대 이해 못 해준다. 왜왜왜 도대체 왜.


사실 맛있는 빵을 파는 곳은 여기 말고도 많다. 하지만 빵이 맛있으면 커피가 별로이거나, 테이크 아웃 전문점 혹은 규모가 너무 작아서 오래 머무르며 시간을 보내기엔 눈치가 보인다.


개인적으로 핸드드립을 하는 카페는 다른 곳보다 오래 머물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핸드드립 자체가 느린 커피인데 '후다닥 마시고 나가주세요.'라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테라로사 본점은 내 기준 삼박자에 잘 맞는다. 가장 중요한 위치만 빼면.



어릴 때는 햄버거도 잘 먹고 빵이란 빵은 다 좋아했던 것 같다. 달달하고 폭신한 공산 빵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구수함과 투박함 외에는 볼 것 없는(?) 거친 빵이 좋아졌다. 거기에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있는, 제각각의 모양을 가진 것이라면 더 좋다.


갑자기 입맛이 바뀌었다기보다는 내 몸이 은근슬쩍 표현을 해준 것 같다. 소화 불량, 피부 트러블, 체중 증가. 그 정도면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알아듣는다.


통밀이 좋다더라 호밀이 좋다더라, 버터나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기본 빵이 소화가 잘 된대. 그래서 찾아 먹기 시작했다. 먹어보니 맛있네. 달달한 디저트보다 커피와 더 잘 어울리기도 했다.



통밀 고다치즈 깜빠뉴. 이름부터 맛있게 생겼다. 쇼케이스 안의 거친 빵 중에 유일하게 반이 잘려 무수한 기공을 뽐내고 있었다. 안 집어 올 이유가 없지.


적당히 거칠고 쫄깃한 식감에 고다치즈가 더해진 맛이 예술이다. 그저 구수할뻔했던 베이스에 짭짤함과 크리미함이 더해졌다. 세상에, 나 이런 빵만 매일 먹으면서 살고 싶어. 아, 가끔 먹어서 더 좋은 거라고 했지. 그래도 그냥 질릴 때까지 먹고 싶다. 왠지 살도 안 찔 것 같아.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진이다. 이래서 사진을 찍어 둔다. 나중에 꺼내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또 먹고 싶다'지만 곧이어 행복감이 몰려온다.


가끔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이런 고물가 시대에 카페에서 25000원을 쓰다니 말이다. 그 돈으로 시장을 봤으면. 어, 그래도 얼마 못 사긴 했겠네. 그냥 커피나 마시자.



다소 작아 보이는 커피잔에 넘칠 듯 찰랑찰랑. 아기 다루듯 소중히 들고 종종걸음으로 자리로 돌아온다. 저 거뭇한 액체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다. 기대에 찬 떨림이라기보다는 아직 카페인에 제대로 적응이 되지 않은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래도 좋다.



나는 오로지 핸드드립 커피가 부드럽고 맛있다는 것밖에 모른다. 이건 산뜻한 차 맛이 느껴지고 저건 고소하고 밸런스가 좋아, 같은 단순한 평가밖에 못한다. 그래도 종류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풍미가 항상 나를 기대하게 만든다.


우리가 주문한 커피는 재스민의 우아한 향과 멜론의 달콤한 맛이 느껴지는 파나마 호세 게이샤(12000원)와 청사과의 풍미와 버터 스카치의 진한 단맛이 느껴지는 코스타리카 리카르도 허니(6500원)이다. 테라로사의 설명을 가져와봤다. 알고 마시면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


오늘의 파나마 호세 게이샤는 나비가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겁지 않아 둥둥 떠있는 것 같지만, 그 몸짓이 전혀 가볍지 않고 우아하다. 기대만큼 산미는 많이 없었다. 비싼 커피니까 조금 더 천천히 마셔야지, 했는데 신랑이 자꾸 뺏어서 마신다.


내 기억에 코스타리카 커피는 처음 주문해 본 것 같다. 신랑 보고 '청사과의 풍미와...'라며 읽어줬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단다. 이런 게 바로 플라세보 효과인가. 나도 한 모금 뺏어서 마셔보니 고소한 맛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무난하다. 그저 그렇네 와는 다른, 핸드드립의 장점을 모두 가진 기본에 충실한 맛이다.




커피잔에 남은 한 방울까지 모두 비워냈다. 이야기를 하면서 빵을 먹는데 이번엔 와인 생각이 난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마시는 것에 진심인 사람이 되었을까. 커피를 끊었을 때도 차 세트를 사놓고 열심히 마셨더랬다. 게다가 하루에 물 1.5리터까지 마셔대니 하마가 따로 없다.


커피든 와인이든 차든 그것 자체로도 행복이지만 곁들일 빵과 디저트가 있어서 더욱 소중하다. 결국 남은 빵을 싸 들고 와서 저녁 식사로 내놓고 와인과 함께 즐겼다. 아무래도 다음 주에는 온 가족이 함께 테라로사에 가야 할 것 같다. 뭐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먹어야 직성이 풀리니까.


부드러운 핸드드립 커피와 구수한 빵 한 조각은 내가 일주일을 버티는 힘이 될 것이다. 문득 나 이런 걸로 힐링하고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었나 보다. 이런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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