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텃밭에 해마다 빼놓지 않고 심는 것이 있다. 옥수수다. 아내는 물론 두 며느리와 손자 손녀들까지 모두 좋아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옥수수는 심어 놓기만 하면 약을 칠 것도 없이 저절로 자라는 것 같으니 텃밭 농사에 안성맞춤이다.
내가 어릴 적에도 옥수수는 고구마와 더불어 시골에서 가장 흔한 먹거리이자 끼니를 때우는 주식이었다. 커다란 솥단지에 한가득 쪄놓은 옥수수는 한나절도 못 가 모두 동이 나기 마련이다. 하모니카를 불듯 양손으로 옥수수를 잡고 뜯어먹으면 그게 부러운 듯 우리 집 누렁이가 졸졸 따라다녔다. 뜨거운 솥단지에서 옥수수 한 개를 건져 누렁이한테 던져주면 어른들은 고함을 치며 야단친다. 누렁이가 뜨거운 것을 덥석 물면 이빨이 다 빠진다는 것이다.
옥수수에 대한 추억은 또 있다. 그 시절 학교에서는 점심시간에 노란 옥수수 빵을 배급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 했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은 외국 원조로 이것을 먹으니 나중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도 했다. 옥수수 빵은 커다랗고 노란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왔다. 빵 배급은 선생님을 도와 반장과 주번으로 뽑힌 친구의 몫이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마다 빵 상자를 밀고 다니며 나누어 주다 보면 늘 여분이 남게 마련이었다. 남은 빵은 반장인 내가 배분했다. 방과 후에 청소를 하거나 교실 환경미화를 도와주는 친구들에게 한 개씩 더 주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옥수수 빵을 타려고 청소당번을 서로 한다고 안달내기도 했다.
나는 내 몫과 추가로 받은 빵을 책보에 싸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옥수수 빵에서 나는 좋은 냄새가 나를 유혹하였지만 눈 빠지게 나를 기다릴 동생들을 생각하면서 침을 삼키며 집으로 달려왔다. 어린 동생들은 두 편으로 갈린다. 내 손에서 빵을 빼앗아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녀석이 있고 장롱 이불속 같은 곳에 숨겨놓고 아껴 먹는 녀석도 있다. 간혹 감춰놓은 빵을 나중에 찾으면 푸른곰팡이가 슬어 먹지도 못하고 속상해했다. 그때 동생들과 함께 나누어 먹던 옥수수 빵의 향기는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나의 어린 시절은 옥수수 향기와 함께 그렇게 영글어 갔다.
옥수수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옥수수가 잘 크라고 따준 어린 곁순은 집에서 기르던 토끼가 가장 좋아했다. 여름 내내 쪄먹고 남은 옥수수는 햇볕에 말려 겨우내 양식에 보태고 단단해진 옥수수 알갱이는 볶아서 차로 마신다. 옥수수수염은 잘 말려두었다 차로 끓여 양치하는 데 쓰고 옥수수를 발라먹고 남은 속대는 불쏘시개로 요긴하게 쓴다. 옥수수 줄기는 소 먹이로 주고 밑 둥은 밭에 두어 거름으로 쓴다. 심지어 옥수수에 붙어사는 무당벌레까지 쓸모가 있다. 진딧물과 깍지벌레를 잡아먹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릴 적 우리 집 채소밭에는 늘 옥수수가 보초를 서듯 줄지어 있었다.
내가 해마다 텃밭에 심는 옥수수는 찰옥수수다. 찰옥수수는 담백한 맛에 쫀득하고 톡톡 터지는 식감이 일품이다. 그 맛을 제대로 보려면 옥수수를 따자마자 바로 쪄먹어야 한다. 수확한 지 하루만 두어도 그 맛이 덜하다. 그래 옥수수를 따는 날에는 야외에 솥단지를 건다. 여러 해 옥수수를 삶다 보니 나만의 방법이 생겼다. 소금이나 뉴슈가 따위를 넣으면 오히려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옥수수 본연의 맛을 해치게 된다. 그 비결은 옥수수 속껍질과 수염에 있다. 그것들을 버리지 말고 함께 삶으면 단맛과 풍미가 더 살아난다. 또한 삶은 옥수수를 김이 나는 채로 바로 냉동고에 넣어 두면 한 겨울까지도 갓 딴 것 같은 찰진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올해도 텃밭에 심은 옥수수가 아주 잘 자랐다. 보름 간격으로 심은 옥수수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키 재기하더니 벌써 꽃대를 피워내고 있다. 나만의 옥수수 삶는 비결까지 생겼으니 벌써부터 옥수수 따는 날이 기다려진다. 다음 주말에는 가족과 지인들을 불러 텃밭 옥수수 잔치를 벌일 생각이다. 벌써부터 군침이 돌고 부자가 다 된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