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실패
말년 병장들의 속마음을 알게 된 건 제대를 앞두고였다. 그들이 왜 기운 없는 미소를 띠고 있는지, 왜 뒷모습이 슬퍼 보이는지, 눈동자가 왜 불안해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제대를 앞두고 그들이 이해된다. 그들은 제대가 두려웠던 것이다. 상병 휴가를 나왔을 때,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어울렸던 친구들과의 인연을 끊었다. 녀석들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담뱃갑처럼 꾸겨서 버렸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봐야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귀담아 듣는 녀석은 없었다.
제대 전후의 불안감은 전문대를 졸업할 때쯤에 다시 찾아왔다. 사회에서의 나의 미래는 그려지지 않았다. 체육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쯤이었다. 편입을 준비했다. 다만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도저히 답이 없을 것 같아서 운동만 잘하면 갈 수 있는 곳을 탐색했다. 서울에 두 곳 있었다.
그러나 졸업 후의 첫 번째 도전은 뜻하지 않게 중단되었다. 매달릴 건 운동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1년 동안 미친 듯이 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다 인대가 끊어지는 줄도 모르고 무리하다가 몸이 상하고 말았다. 회복이 가능한지 묻는 내 질문에 의사는 고개를 저였다.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믿는 건 몸 밖에 없었는데 몸이 망가져버리니 정신까지 무너져 버렸다. 여러 달이 지나도록 집에 처박혀서 밖으로 나갈 줄 몰랐다. 원래 가진 게 없었으니 괘찮아,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마음은 좀체 낫질 않았다.
그 무렵, 경찰행정학과에 다니는 친구에게 '얌마! 그렇게 폐인처럼 살지 말고 나랑 같이 경찰이나 해보자'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안 그래도 어머니의 잔소리를 견디기 힘들 때였다. 벌써 집에서 빈둥거리는 게 몇 달째인가. 나는 냉큼 그러자고 생각하고 경찰 시험을 준비했다. 졸업 후 두 번째 도전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제대로 공부했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더구나 5과목을 한꺼번에 공부해야 하다니! 주변에는 공부 잘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물어볼 사람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가 명문대 과잠바를 입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무작정 다가가서 공부법을 물었다. 물으면 신기하게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예컨대 한 권을 빠르게 읽는 게 먼저다. 그 다음 기출문제를 뽑은 뒤에 출제된 지문을 찾아 표기한다. 예상문제도 보면서 해당 지문에 다른 색으로 표기한다. 그렇게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 파악한 뒤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혹은 요약본을 만들어서 수시로 들여다본다, 시험이 임박하면 요약본을 보면서 외운다..... 공부를 해본 사람들의 방법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나는 형법을 비롯하여 형사소송법, 수사과목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창 공부하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동영상 강의를 듣던 중에 강사의 이런 얘기가 귀에 꽂혔다. '문제가 있던 사람들은 경찰 되기 힘들어요.' 퍼뜩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어릴 적 일으켰던 2건의 사고가 마음에 걸렸다. 노량진에 있는 동작 경찰서에 가서 확인해 보니 역시나 결격 사유였다. 이런!
실력도 없었지만 빽도 없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뭔가 도약의 기회를 잡고 싶은데 자꾸만 발목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찾아간 곳은 하나로통신(현 sk 브로드밴드)이었다. 아르바이트 정보를 찾다가 알게 된 곳이었다. 나름 근무조건이 괜찮아서 주5일 근무에 월 120만 원, 그리고 플러스앞파가 있었다. 면접관은 으름장부터 놓았다. 해지상담 업무인데 정말 힘들다, 할 수 있겠느냐? 그때 나는 조금은 뻔뻔하고, 조금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자신 있습니다. 뽑아만 주세요."
큰소리를 치고 다음날부터 출근하기 시작했다. 콜센터 해지상담부는 중앙 모니터를 통해서 상담사의 실적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우리끼리는 방어율이라고 불렀는데 몇 통의 해지상담 전화 가운데 몇 건의 해지를 막았는지 나타내는 지표였다. 상담사가 받은 전화 통화수도 나오고 몇 분 쉬었는지까지 모니터에 다 떴다. 아마 일반 상담사들에게는 이게 꼭 감시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은근 경쟁심이 발동했다.
‘한번 1등 먹어보자.’
준비 기간이나 적응 기간도 필요 없었다. 남들 10통 받을 때 나는 20통씩 받았다. 다른 통신사가 어떤 혜택을 주는지 파악해 두었다가 해지를 요청하는 고객에게 더 좋은 혜택을 주겠다고 설득했다. 딱 이 두 가지였다. 더 많이 받을 것, 그리고 고객이 해지하려는 그 이유, 즉 다른 통신사로 갈아타려는 그 이유를 파악하여 충족시킬 것. 그렇게 3개월이 지나자 나는 안양 센터 1등이 되었다. 다시 3개월이 흘렀을 때 전국 상담사 중에서 1등이 되었다. 나는 이미 열외 취급을 받았다. 팀장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알아서 하면 그만이었다. 쉬는 시간도 내 마음대로였다. 누구 하나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다. 새로 입사한 상담사들은 수습 기간에 내 옆에 앉으려고 했다.
성과급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해 매달 170만 원씩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렸다. 어머니는 내가 학업을 중단한 일이 내내 마음이 걸리셨는지 돈을 받으시면서도 마음은 늘 불편해하셨던 것 같다. 그래도 제대 후 모처럼 사람 노릇 하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아마 이 경험 덕분에 자신감을 회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무렵, 경찰행정학과를 나오면 경찰 되는 데 큰 무리가 없으리라는 출처 불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1년여의 하나로통신사 생활을 접을 때가 왔다. 센터장의 만류도 뿌리치고 과감히 편입시험에 도전했다. 편입은 정말 쉬웠다. 이전 대학교 성적만 봤기 때문에 떨어지는 게 도리어 이상했다. 그렇게 원광대 경찰행정학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그런데 반 년 수강 후 나는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처음, 친구의 권유로 마음에 두기 시작한 경찰 공무원이었는데 학교를 다니다 보니 내 적성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단 한 번이라도 경찰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던가? 체육교사 도전 실패 이후 뭔가 하고 싶은 찰나에 그냥 권유 받고 그냥 도전해 본 게 전부 아니었나? 학교 출석부는 찍고 있었지만 재미가 없었다. 한 학기만 다니고 휴학계를 제출했다.
어머니는 노발대발이었다. 엉뚱한 마음먹지 말라고 다그치고, 경찰처럼 좋은 게 어디 있느냐고 타이르기도 했다. 아니, 경찰이 안 되도 좋으니 제발 4년제만 졸업해 달라고 애원하셨다. 그게 어머니의 평생소원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 마음은 움직일 줄 몰랐다. 내가 걸어갈 길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까? 경찰이라면 좋은 직장이라고 믿고 살았던 어머니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어머니와 충돌이 잦아졌다. 나라고 좋아서 그만둔 건 아니었다. 뭔가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뿐이다. 여러 날 싸움이 격해졌을 때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끔찍한 습성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감춰두었던 분노가 끓어오르던 그날 나는 살림을 부수고 말았다. 마치 짐승 같았다.
그날도 어머니와 심하게 다투다가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느끼던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마침 집에 뒹굴고 다니던 책 한 권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를 안정시킬 게 필요했다. 거리에 앉아서 책자를 뒤적이다 보니 <명심보감>이었다. 마침 효(孝)에 관한 장이었다. 마음이 다시 분노에 휩싸이려고 하면 억지로 명심보감 문구에 집중하며 내 안에 뒤엉킨 감정을 풀어내려고 했다. 한 30분쯤 그렇게 내면에서 싸움이 벌어졌던 것 같다. 간신히 화를 누르고 나자, 부끄러웠다. 참 나쁜 아들 같았다. 전화기를 들었다.
“죄송해요. 안 그러려고 하는데 자꾸만 저도 모르게 화가 나요. 정말 죄송해요.”
수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날이 춥구나. 얼른 들어와서 뜨끈한 국물에 밥이라도 말아먹자.”
나는 지금껏 살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없다. 그래서 울컥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인생의 사다리를 올라간 사람들은,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내게는 세 번의 기회 대신 세 번의 실패가 있었다. 인생이라는 크나큰 퍼즐판에 세 번 정도 조각퍼즐을 잘못 맞춘 것이라고 믿고 넘어가기에는 그 쓰라림이 너무 컸다. 사람 나이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한 책임은 자시니 져야 한다고 하는데 내 얼굴은 내가 책임질 만한 그 얼굴이 되어가는 걸까? 내가 책임져야 할 그 얼굴이 되기 위해 나는 찡그리고 슬퍼하는 표정을 짓는 법부터 배운 것인지 모른다.
제대할 때의 두려웠던 그 마음은 여전히 내 가슴 한 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때보다 인생이 더 망가지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나는 바닥이었고, 그래서 힘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닥이라면 지금부터 하는 모든 행위는 나를 위로 올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