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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독일행 초인 용쌤 Mar 30. 2018

달려라. 유근용

폐는 타고나는 것 같다. 100미터 단거리를 잘 뛰는 선수라도 1,500미터 오래 달리기를 잘하라는 보장은 없다. 초원을 달려가는 들소 떼 중에도 유독 앞으로 치고 나가 선두에 서는 들소 한 마리는 꼭 있는 법이다. 축구나 농구를 좋아했던 나도 체력으로는 남에게 뒤처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장거리 달리기는 그냥 평범했다. 타고난 폐활량 자체가 크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장거리만의 뭔가 비결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나에게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조금 이상한 습성이 있었다.


  군에 입대했을 때는 봄이었다. 군대는 어중간한 날씨라는 게 없다. 추우면 춥고 더우면 덥다. 4월이 되자 태양은 잡아먹을 듯이 뜨겁게 타올랐다. 훈련은 고되고, 속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살갗은 아직 길들지 않은 군복에 쓸려서 빨갛게 부풀어 오르곤 했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식당에 모이면 우리를 기다리는 건 뜨겁게 가열된 물이었다.


  훈련소에는 차가운 물이 없었다. 아마도 식중독 예방 차원인 것 같았다. 목구멍 열고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전도율이 높아서 쥐고 있으면 뜨거워지는 쇠 컵을 들고 스테인리스 통 앞에 가서 뜨거운 물을 받는 게 전부였다. 입천장이 홀랑 까지고 싶지 않다면 호호 불면서 충분히 식기를 기다려야 할 만큼 잔인하게 뜨거웠던 물. 군대는, 전투력 못지않게 인내력을 시험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 중 딱 한 번 차가운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우유였다. 뭐, 1인당 하나씩 배급되었으니까 때가 되면 200씨씨 한 모금을 마실 수 있었다. 200씨씨가 아쉬운 한모금처럼 느껴질 만큼 그 시원한 맛이 좋았던 것인지 모른다. 누가 먼저 꺼낸 말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유 내기를 했다. 구보든 운동장 돌기든 상관없다. 그날 오래 달리기 1등이 우유를 다 먹는다! 어차피 군대에서는 오래 달리기를 하면 매번 순위를 가리니까 따로 1등을 따질 필요도 없다. 훈련 받고, 그 결과에 따라 1등이 우유를 마시면 끝이다. 나는 사소한 데 목숨을 걸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나의 오래 달리기는 그냥 그랬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박태환이나 조오련도 아닌 내가 어디서 그런 폐활량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기를 시작한 그날부터 나는 오래 달리기에서 1등을 먹기 시작했다! 아마 상상하기 힘들지 모르겠다. 숨소리를 쇳소리로 변해 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내장이 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고,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널을 뛴다. 땀이나 더위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허리를 숙인 채 숨을 쌕쌕 몰아쉬면서 내 뒤로 들어오는 동기들의 얼굴을 본다. 오늘도 1등이다!



   자비란 없었다. 내기에 참여한 동기들의 우유를 모아서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마시면 더위와 고된 훈련과 스트레스마저 싹 잊게 된다. 그건 천상의 맛이었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순수한 실력만 놓고 누가 더 잘 뛰는지 물었다면 1등은 내가 아니라고 답했을 것 같다. 그런데도 내가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사소한 데 목숨을 거는 성격?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오래 달리기 1등은 자대 배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훈련소 시절 이기는 습관이 붙어서 그랬다는 건 절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오래 달리기에 재능이 없다. 그런데도 이병 계급장을 다는 순간부터 병장 제대할 때까지 나는 오래 달리기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물론 매번 힘들었다. 뛸 때마다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래도 미친 듯이 뛰었다. 1등을 도맡다 보니까 나중에는 '저 놈은 타고난 놈'이라며 나를 빼고 저희들끼리만 순위를 매겼다.


  오래 달리기는 은근 경쟁이 붙는 훈련이었다. 같은 중대 안에서도 1등이라는 타이틀을 놓고 사병끼리 경쟁이 심했고, 때로는 이웃 중대와의 자존심 대결로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 때문에 부대 사람들은 나를 좋아했다. 매번 1등을 놓치지 않는 그 놀라운 에너지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중대장이었던 모 대위는 행군을 뛰고 나서도 축구공을 찰 정도로 축구 마니아였다. 그는 경기장에서 걷고 있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나는 축구 시합을 뛸 때도 절대 걷거나 쉬지 않았는데 중대장은 그런 나를 좋아했다. 그는 내가 속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동시에 힘든 걸 내색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지금도 모를 것이다.


  더 이상 우유 내기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훈련병 때부터 말년 병장 때까지 오래 달리기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이유도, 정말 사소했다. 흡연자에게 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상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담배도 안 피는 사람이 담배 피는 사람에게 진다는 게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다. 난 사소한 데 목숨을 잘 걸었고, 그게 죽을 만큼 힘든 장거리 달리기의 고통을 이겨내는 원동력이었다.


.....지기 싫어하고, 사소한 데 목숨을 거는 습성이 다시 도진 건 책을 읽을 때였다. 2002년 5월 <가시고기>로ㅍ부터 시작된 나의 독서생활은 올해로 16년째에 이른다. 정확히 세어 본 적은 없지만 지금껏 3천 권 정도의 책을 읽은 것 같다. 다 읽은 책 중 다수는 기부하여 지금은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거나 혹은 서가에 꽂혀서 주인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창 책을 읽을 때 나는 교보 플래티넘 회원이었다. 나중에는 책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겸사겸사 강남 교보문고 근처로 이사 갔다. 매일 정한 분량을 다 읽기 전에는 서점에서 나오지 않았다. 휴일에는 하루에 2~3권씩 읽었다. 그때 내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역시 사소함에 목숨 거는 습성 때문일까?


  처음 시작한 자존심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 내 인생을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지금 생각하면 절대 사소하지 않은 이유가 나를 움직였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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