純爺(sunya)의 갈색 사유 제7화 만우절의 바보들

by 순야 착지


우절의 바보들, 그리고 찻잔 속의 진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譚) 중에는 세상에 처음으로 '거짓말'이 등장한 비극적 일화를 다룬 '체티야(Cetiya) 왕'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까마득한 옛날,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체티야 왕이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군중 앞에서 사실과 다른 거짓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세상의 질서가 흔들리며 대지가 그 거짓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쩍 갈라졌고, 왕은 산 채로 지옥의 불길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섬뜩한 이야기는 한 번 뱉은 거짓말이 얼마나 무서운 업(業)이 되어 우리 삶의 근간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경고다.

4월의 첫날, 세상은 가벼운 거짓말이 애교로 용인되는 '만우절(萬愚節)'을 맞이한다. 이 흥미로운 날은 1564년 프랑스의 왕 샤를 9세가 새해 첫날을 4월 1일에서 1월 1일로 바꾸는 달력 개혁을 단행하며 시작되었다. 바뀐 달력을 모르고 여전히 4월 1일에 신년 축제를 벌이는 사람들을 '4월의 바보'라 부르며 가짜 선물을 보내 놀려대던 장난이 그 시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 역사 속에도 이와 꼭 닮은, 심지어 훨씬 더 낭만적인 '조선판 만우절'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첫눈 내리는 날'이다. 조선시대에는 첫눈이 오면 왕과 신하 사이의 엄격한 신분마저 허물고 짓궂은 장난을 눈감아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왕위에서 물러난 태종 이방원이 형인 정종에게 첫눈을 약상자에 담아 단단히 포장한 뒤 "몸에 좋은 보신 약(藥)을 보낸다"며 거짓 심부름꾼을 보냈다.

이 장난에는 유쾌한 규칙이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고 속으면 받은 사람이 한턱을 내야 하고, 반대로 속임수를 눈치채고 심부름꾼을 붙잡으면 보낸 사람이 잔치를 베풀어야 했다. 정종은 단번에 장난임을 알아채고 "저놈 잡아라!" 외쳤으나 심부름꾼은 잽싸게 도망쳐 버렸다. 결국 속아 넘어간 셈이 된 정종은 호탕하게 웃으며 동생 태종과 신하들에게 푸짐한 술과 고기를 대접했다. 팍팍한 삶 속에 하루쯤은 유쾌한 일탈을 꿈꾸며 서로를 향해 웃음을 터뜨리는 마음은 동서양이 매한가지인 듯하다.

연초록 새순이 기지개를 켜는 울산대공원의 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며, 순야옹은 이 '가벼운 속임수'의 날에 문득 무거운 사유에 잠긴다. 우리는 일 년에 단 하루, 남을 속이며 즐거워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남은 364일 동안은 그보다 더 치명적인 거짓말에 속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바로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이다.

영원하지 않은 젊음과 권력을 영원할 것이라 믿는 착각, 텅 비어 있는 실체를 쥐고 '내 것'이라 우기는 아집(我執). 세상이 바뀐 줄도 모르고 과거의 시간에 집착했던 16세기 프랑스의 '4월의 바보들'처럼, 우리 역시 허상을 진짜라 믿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바보들일지 모른다. 불교에서는 이처럼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에 속아 진실을 보지 못하는 어둠을 가리켜 '무명(無明)'이라 부른다.

순야옹은 볕이 잘 드는 산책로 벤치에 자리를 잡고 배낭에서 스테인리스 보온통을 꺼낸다. 뜨거운 물이 표일배를 통과하며 진한 보이숙차를 우려낸다. 찻잔을 가득 채우는 흑갈색 찻물은 어떠한 꾸밈도, 거짓도 없는 묵직하고 솔직한 빛깔이다. 한 모금 천천히 입에 머금자, 떫고 쓴맛 뒤에 숨어 있던 은은한 단맛(회감, 回甘)이 정직하게 혀끝에 감돈다. 차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뜨거운 물을 만나면 제 몸을 녹여 있는 그대로의 향기와 색을 내어줄 뿐이다.

찻잔을 감싼 두 손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든다. 진짜 진실은 거창한 논리나 세상의 인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손끝에 닿는 찻잔의 온기, 뺨을 스치는 4월의 봄바람처럼 '있는 그대로의 알아차림' 속에 있다. 오늘 하루, 만우절의 가벼운 농담처럼 얽매였던 삶의 착각과 낡은 아집들을 소리 내어 한 번 웃어넘기고, 찻물처럼 맑고 투명한 본래의 나(眞我)를 마주해 볼 일이다.


순야옹의 시(詩)

사월의 첫날, 세상은 웃으며 서로를 속이지만

어리석은 중생은 평생을 스스로 속이며 사는구나.

붙잡을 수 없는 바람을 내 것이라 우기며

신기루 같은 탐욕의 사막을 헤매었네.

울산대공원 연초록 봄빛 아래

가식 없는 흑갈색 보이차 한 잔을 우려낸다.

거짓된 망상(妄想)은 한낱 농담처럼 훌훌 날려 보내고

찻잔 밑바닥에 고인 고요한 진실을 들이마시네.


[오늘의 법구경]

거짓을 말하는 자는 지옥에 가고,

자신이 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자도 또한 그러하다.

진실하지 못한 행동을 한 이 두 사람은

죽은 뒤에 저세상에서 똑같은 과보를 받는다. (『법구경』 제22장 지옥의 품, 306게송)


[순야의 추천 도서]

스스로를 속이는 환상에서 깨어나고 싶다면

『진리의 말씀 법구경』 법정 편역, 이레, 2005년 08월 30일

이번 주, 만우절의 가벼운 장난 속에서 '무명(無明)'이라는 묵직한 진실을 마주하셨다면 법정 스님이 번역하고 해설하신 『진리의 말씀 (법구경)』을 펼쳐보시기를 권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널리 읽히는 불교 경전인 『법구경』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속이고 허상에 집착하는지를 아주 맑고 간결한 언어로 일깨워 줍니다. 특히 법정 스님 특유의 담백하고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은, 마치 벤치에 앉아 따뜻한 보이차 한 잔을 나누며 듣는 다정한 조언처럼 다가옵니다. 어지러운 세상의 거짓말과 내 마음속의 아집을 씻어내고 싶을 때, 곁에 두고 틈틈이 한 구절씩 음미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거울은 없을 것입니다.


[연재 안내]

'순야(sunya)의 갈색 사유'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차 향기와 함께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길 위에서 만난 역사와 지혜의 문장이 당신의 주말을 포근하게 감싸 안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말,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차 한 잔 나누며, 나를 비워 세상을 채우는 평온한 시간 보내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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