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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Jun 23. 2024

<언제나 책봄> '흐르는 강물처럼'

모두가 떠나도 자연은 그 자리에 있잖아

불볕 같은 한 주가 지난 주말 더위를 식히는 고마운 비가 하루종일 내린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비라서 내심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더위를 타지 않는 편이라 웬만한 무더위에도 꿈쩍없는 내게도 지난 한 주는 날 움찔하게 만들었다. 내 기억으론 6월에 이렇게 더운 적은 처음인 거 같다. 매년 내 생일이 있는 6월이 오면 5월 말부터 아이처럼 설레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런데 올해는 나이가 들어 철이 드는 건지 예전처럼 호들갑스럽게 생일주간을 꽉 채우기보단 세상에 태어난 날인 생일(生日)을 곱씹으며 감사의 마음을 가졌던 거 같다. 그리고 지구가 이렇게 점점 뜨거워지고 있음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안방에 누워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읽는다. 마감을 코 앞에 두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2/3 가량 남았는데도 전혀 초조하거나 걱정이 되지 않는다. 책의 제목처럼 내 마음도 글을 따라 부유하고 있다. 때론 급류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고, 때론 바람과 햇살에 반짝이는 강가의 윤슬처럼 잔잔히 일렁인다. 일주일에 한 번 책을 읽고 후기를 쓰는 <언제나 책봄> 23주째를 맞이하며 분명히 달라진 것 중 하나는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 닥쳤을 때라 해도 성정 자체가 급하고 불 같던 예전의 내가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다는 걸 느껴가는 중이다. 마음의 중심이 바로 서 단단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책 속의 주인공인 사랑스러운 토리, 빅토리아 내시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도 그녀처럼 조금씩 단단해져가고 있는 느낌.




사춘기가 찾아온 남매의 변화처럼 우리 가족의 생활 패턴도 점점 변해가고 있던 중이었다. 바쁜 주중을 보내고 가끔 한가한 주말이 찾아와도 딸내미는 나보다는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고 14살이 된 큰 아들은 방에 콕 들어가 게임 삼매경에 빠져 엄마인 날 찾는 횟수가 점점 줄고 있다. 한 달에 두 번 b가 쉬는 일요일이나 돼야 가까스로 네 가족이 완전체가 되는 정도? 엄마 껌딱지였던 두 아이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면서도 약간의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없나 보다. 집에 사는 친정 부모님은 더 하시겠지...

게임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냐며 아들을 채근하고 있는데 친정엄마가 안방에서 나와 한마디 거드신다.


"일도 좋고 애들이 커가는 것도 알겠는데 아마 지금이 너희와 살 부딪치며 보내는 시기가 끝물일지도 몰라. 애들 점점 더 크면 더 너희들이랑 보내는 시간도 없어질 거고, 나이 든 우리는 더하고... 둘 다 너무 늦게 들어오는데 어쩔 때 너희 딸 보면 안 됐기도 해. 방에서 핸드폰 보면서 혼자 있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채워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얘들아 너희들도 잘 들어. 할머니 혼자 안방에 있으면 옆에 같이 누워서 핸드폰 봐도 되고 그래. 할머니도 가끔 안아주고...."


엄마가 이 말 즈음을 할 때 마음이 울컥했다. '바쁘단 핑계로 너무 내 생활에만 급급했구나. 한 집에 북적이며 여섯 명이 살고 있지만 조금씩 우리도 변해가고 있었구나'


그 이후에도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우리 부부는 우리대로 바쁘게 살고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지금 이 순간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에서 조금씩 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엄마 옆에 누워 책을 읽는다. 엄마는 영화를 보고 난 책을 읽지만 같은 공간이 주는 온기 속에서.


브래드 피트의 전성기였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과 이름이 같지만 이 책은 시대에 좌절한 젊은 여성인 빅토리아 내시가 금지된 사랑을 하며 겪게 되는 대사서시이다. 빅토리아가 거친 삶의 여정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내디뎌 버티고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콜로라도의 자연이 그녀에게 준 깨달음과 지혜, 눈물 나도록 아름답게 묘사된 자연의 풍경, 숲 속에서 혼자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버리고 숲을 내달려야 했던 절실함과 절박함, 모순 같지만 엄마이기에 버틸 수 있었던 힘.

그리고 빅토리아의 강인한 회복탄성력이 있었기에 맞이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결말과 운명의 반전.


한 주 한 주를 더해가며 이렇게 주옥같이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한 오늘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즈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내 옆에서 볼륨을 작게 틀어놓고 영화를 보는 엄마를 라본다. 내 엄마. 우리 엄마. 백번을 말해도 남자들은 이해 못 할 모성애. 탯줄로 연결된 아이와 나와 느꼈던 소중한 교감.

열 달을 뱃속에 품었던 그 생생한 느낌들을 다시 떠올려 봤다.


끝없는 리듬 속에서 두려움이 사그라드는 만큼 나와 아기는 점점 성장했다. 5월 말이 되자 내 배는 수박처럼 둥글둥글해지고 딴딴해졌다. 몸 구석구석에 살이 붙어 풍만해졌다. 낯설어진 내 몸속에서 아기는 기지개를 켜고, 발길질을 하고, 몸을 이리저리 뒤집어 댔다.
낮게 깔린 구림이 골짜기를 감싸 안은 어느 날 밤, 배 속의 아기와 함께 이불이라는 둥지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누운 채 지금 숲속에서 나처럼 온기를 찾아 잔뜩 웅크리고 있을 다른 동물들을 생각했다. 숲속의 다른 어미들도 나처럼 새끼의 발차기를 느낄까? 그 어미들은 새끼들을 어떻게 먹이고 키우고 보호할까? 몸집이 가장 큰 곰부터 아주 작은 곤충까지, 또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까지, 탄생하고 견디고 시드는 만물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숲속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윌이 줄곧 내게 알려주고 싶어 했던 진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언제나 책봄> 연재를 시작한 이후 만난 최고의 책이었다.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들이 날 사로잡을지 몰라도.

내 마음을 두드린 한 권의 책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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