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자 Jul 20. 2017

그 여行자의 집 (20)

2008년 여름, 스물다섯 민주의 그 해. #20

20.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10시 48분. 벌써? 어젯밤 섞어 마신 술 때문인지 아직 피곤이 가시질 않았다. 암막커튼 때문에 실내는 아직 어둡다. 시간 따윈 상관치 말고 맘껏 게을러져도 된다고 응원을 보내는 것만 같다. 그래도 금쪽같은 하루의 절반을 날려 보낼 수는 없기에 침대 머리맡의 개인 조명을 켰다. 건너편 침대의 미카는 나갔는지 침대만 어지럽혀져 있고 보이질 않는다. 그 소리를 하나도 못 들을 걸 보면 내가 헨리 그놈의 꼬임에 넘어가서 술을 많이 마셨긴 했나 보다.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걸어가 대충 세수를 하고 나와 커튼을 열었다. 순간 훽 이불을 끌어당기는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화장실 앞 침대 2층의 스위스에서 왔다는 여자가 아직 자고 있다. 다시, 슬쩍 커튼 절반 이상 닫고 괜스레 찔리는 마음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거실은 한적하고 리셉션에서는 준킷와 어젯밤 만난 한국인 그녀가 이야기 중이다. 구수한 커피 향이 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 호스텔은 화장실이 딸린 4인실 방 2개, 6인실 방 2개가 있는 20명이 수용 가능한 작은 호스텔이다. 집 같은 아늑함이 돋보이는 공용공간의 구조에 방마다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어 5층을 계단으로 올라와야 한다는 것을 빼곤 머무는데 불편함은 없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을 해보자면 인당 숙박비를 생각했을 때, 이렇게 장사해서 남는 게 있기나 할지 우려가 된다. 나는 6인실 여성 도미토리에 묵고 있는데, 거기에는 2층 침대 3개와 샤워시설이 함께 있는 화장실, 그리고 전신 거울이 달린 작은 화장대, 침대 밑 개인 수납장, 침대별 조명과 작은 선반, 공용 옷 행거가 있다. 호스텔 치고는 작은 편에 단출한 살림이지만 디자인이 모던하고 심플한 데다가, 침대도 편하고, 전체적으로 깔끔해서 지내기에 좋다. 게다가 마냥 빈둥거리고 싶은 예쁜 공용 부엌과 라운지도 있다. 라운지에서는 평일 저녁 7시면 숙박객 누구나 자신의 음료나 먹거리를 사 와서 함께 인사하고 어울리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소셜 다이닝이란 프로그램이 열리는데, 지난 며칠 함께 해 본 바 매우 재밌다. 준킷은 이 프로그램을 자신이 만든 거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준킷이 쉬는 토요일 저녁에는 프로그램이 없다. 뭐 사람들이 많아서 재미가 없는 데다 그 날은 나가 노는 게 좋아서라고 하는데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준킷은 왠지 사장 포스가 풍기는 특별한 스태프이고, 이 호스텔이 아직까지 내가 가본 곳 중 가장 스태프가 편하고, 분위기도 최고인 것만은 확실하다. 준킷이 흐느적대는 나를 불러 그녀에게 갔던 곳 중 어디가 좋았는지 좀 알려주라고 한다. 자기가 내게 알려 준 맛집들도. 이 놈 참 일 쉽게 하네. 나는 괜스레 비싼 척을 하며 으름장을 놓다가 다시 그녀와 제대로 인사를 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껌벅이며 답을 구한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실은 저도 잘 몰라요. 뭐, 온 지 닷새밖에 안 됐고 와서 제일 열심히 한 일은 밤에 애들하고 놀면서 술 마시고 늦게까지 퍼잔 거뿐이라. 뭐, 좋아하세요? 먹을 거? 쇼핑? 바다? 야경? 홍콩은 그런 게 젤 유명한데.」

 「정말요? 저는 민주 씨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하고 엄청 친해 보여서... 글쎄요. 사실 혼자 여행을 하는 게 처음이라 특별히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난 한국에서도 거의 집, 회사만 왔다 갔다 하는 집순이였거든요. 뭘 하면 좋을까요?」

허허, 뭘 하면 좋을까라. 이 분 꽤나 어려운 질문을 하신다. 게다가 동정가게 첫 여행에 근본이 집순이라니..

「뭐, 그럼 그냥 저처럼 빈둥대는 건 어떨까요? 그럼 만사 고민할 거 없이 쉬워지는데?」

내가 농담 반 씩 웃으며 건넨 말에 그녀가 미소 짓는다. 

「그도 괜찮겠네요. 생각해보니 제가 못하고 산 것 중 하나가 빈둥대며 사는 거였던 거 같아요.」

그녀의 얼굴에 왠지 모를 공허의 그늘이 보였다. 

「그래요? 잘됐네. 그럼 좀 빈둥대 보세요. 그럼 우리 빈둥대다가 이따 저녁에 만나요!」 

어색해지는 듯한 분위기를 재빨리 넘기고 나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뭔가 느낌이 좀 싸하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슬퍼 보이는 건지, 힘들어 보이는 건지, 그것도 아님 누군가 손 내밀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건지, 아니 포기한 건가? 설마 생을 포기하려고? 뒤돌아보니 그녀는 테이블 위의 홍콩 관광지도 겉표지를 빤히 보고 있는 듯했다. 아, 뭔가 찝찝하다. 

「 딤섬 먹으러 갈래요? 요 앞에 괜찮은 식당 아는데.」

아, 젠장. 말해버렸다. 

「네, 좋아요.」

그녀가 초롱해진 눈으로 나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다. 그렇게 그녀는 내 여행으로 들어왔다. 아니, 내가 그녀의 여행으로 들어간 건가? 뭐, 어쨌든.



프로젝트 여행자의 집, 네 번째 이야기 中 :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는 글 참고 

그 여行자의 집 : 1장, 단아의 이야기  |  2장, 경재의 이야기 | 3장, 민주의 이야기


이전 19화 그 여行자의 집 (19)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