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한 권! / 문근숙_경기새넷 교사
지난가을쯤이었던 것 같다. 코로나로 축소된 관계에 익숙해졌고, 혼자 분투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꾸 안으로 자꾸 움츠러들었다. 운전하면서 혼잣말도 늘고, 어쩌다 감정을 드러낼 때는 거름망 없는 듯 까칠하게 흘러나왔다. 회색빛 가을이었다.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둘이 구시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잘 지내는지로 시작하는 대화는 아이들, 학교 이야기를 돌아 세상 사는 이야기까지 흘러갔다. 대화는 한숨과 웃음 사이를 왔다 갔다가 하다가 끝났다. 그렇게 지난겨울을 보냈다.
웅크린 채로 가을, 겨울을 보내고 나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웅크린 채로 내가 굳어 가는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기지개를 켜야 했다. 이런저런 운동을 시작하자 굳어가던 어깨와 다리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몸이 움직이자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햇살과 산책이 최고의 우울증 치료제라는 것을 체감했다. 조금 살만해졌다. 마음을 내는데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내향형답게 작은 에너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책이다. 2023 새로운학교경기네트워크 소모임으로 책 모임을 만들어보자. 수다의 영역을 넓히고, 우리 마음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책 모임 할 결심을 나름 비장하게 하고 나니 책 모임 이름이 필요했다. 멋진 이름으로 책 모임 공고 포스터를 내어 좋은 선생님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드라마나 영화 제목을 패러디해볼까? ‘책 읽을 결심’, ‘최강독서’, ‘웰컴투 책 모임’, ‘놀면 뭐 하니?’, ‘책 읽자’ 등을 생각하며 오랜만에 혼자 낄낄대며 웃었다. 그래도 책 모임이니 책 속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이전 학교에서 연구회를 함께 했던 선생님들과 4년 정도 책 모임을 했다. 당시 모임을 주관하던 선생님께서 첫 번째로 선정한 책이 바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었다. 많은 이야기가 분명 오고 가겠지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단어는 ‘광장’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이 있었다. 학생들 앞에서 수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청중의 수와 상관없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데는 보통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고, 얼굴이 붉어졌던 분이다.
자유로운 공간은 공동체 안에 있는 특별한 종류의 공적인 장소로서 사람들이 새로운 자존감, 더 깊고 자신 있는 집단 정체성, 공적인 기술, 협동의 가치, 그리고 시민적 덕성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생활과 거대한 기구 사이에 있는 장소로서 여기서 평범한 시민들은 위엄, 독립성, 그리고 비전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다. 지역의 이웃, 도시의 골목, 도시의 공원과 광장, 카페, 도서관, 자발적이고 사적인 여러 모임 등 평범한 장소이다. (p.167~168 )
이 부분을 읽어주면서, 이 모임은 본인에게 광장이라고 말하였다. 5명이 하는 작은 모임이지만 참여하는 우리 모두에겐 분명 광장이었다. 다소 민감한 종교, 정치 성향, 성소수자, 이민수용 등에 대해서 솔직하게 생각을 나누었다. 찬반으로 팽팽하게 맞서기도 하고, 모두 한 마음으로 성토하기도 했다. 교사, 부모, 자식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애환을 서로 나누었다. 달콤한 프렌치토스트와 커피가 맛있는 카페에서 자주 만났는데, 달달하면서도 쌉싸름한 작은 광장이었다. 그 카페 같은 연대를 꿈꾸며 책 모임 이름에 광장을 넣기로 했다. 월요일에 열리는 월요광장.
이 책은 민주주의를 꿈꾸다 비통함을 느낀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민주주의를 가꾸어가는 비방서이다. 고대 비방서나 예언서처럼 이 책은 많은 선문답으로 넘쳐난다. 먼저 민주주의의 생태계를 다룬다. 민주주의 생태계를 생각하면 억울함이 없는 사법 체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복지 시스템, 다양한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 체계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 기대와 달리 여기 1장에서는 자연 대초원의 생물다양성을 이야기며 우리 세상에서의 다양성을 말한다.
야생의 대초원이 농경지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듯이 민주주의는 독재보다 효율이 떨어진다. 우리는 도덕적이고 실용적으로 긴급한 사안들에 대해서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 그러나 저효율은 자유롭게 표출되어 국가를 강하게 할 수 있는 인간적 다양성으로 상쇄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다양성 덕분에 우리는 위험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으며, 상업에서 과학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창조성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p.49)
다양성, 역동성 정말 멋진 단어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감당하기 어려운 말이다. 다양성이 창조성으로 발화까지의 그 지난한 과정을 견디기 어려워 힘들었던 수많은 나날이 있었고, 오늘도 다양성에서 오는 긴장 속에서 여전한 버거움을 느끼고 있다. 마음은 부서졌고, 수천 개의 조각으로 흩어졌다. 파커 J. 파머는 부서져 흩어진 마음이 경험이 지닌 복합성과 모순을 끌어안을 위대한 능력으로 깨어져 열리기를 이야기하지만 나는 늘 부서지고 흩어져버렸다. (p.57)
많은 이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이견을 내는데 자신 없어 한다.(이 글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성장시킨 교육, 종교 제도들은 우리를 드라마의 배우가 아니라 관객의 일원으로 취급한다. 그 결과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정치를 스포츠처럼 관람한다. (p.95) 민주주의를 글로 배워서 교사가 되었다. 온전히 익히지 못한 채 교사로서 학생들을 만났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내 권위에 대한 도전처럼 여겨진 적도 있었고, 나의 프레임에 들어오지 않는 학생은 갖은 애를 써서 들어오게 만들려고 했다. 좋다고 여겨지는 방향은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양성에서 빚어지는 차이, 차이가 불러오는 긴장은 애써 의식 아래로 눌렀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어떤 사람들의 신념이 아무리 기가 막히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도 반대자들의 인간성을 부정하거나 더 나아가 민주주의 기반인 정치적 생태계를 훼손하지 않고 시민 공동체에서 목소리 내는 법을 나는 배우지 못했다. (p.76) 다름은 효율성의 저해 요소였고, 대화나 회의는 요식행위에 불과한 적도 많았다.
그러한 나의 일상에 작은 금이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비교적 괜찮은 교사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며 잘살고 있던 어느 날 옆반 동료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수업 이동을 위해 복도에서 아이들 줄을 세우고 있었다. “아이들을 그냥 한 줄로 세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날 나는 늘 해오던 대로 남자 한 줄, 여자 한 줄을 열심히 세우고 있었다. 그 사소한 질문은 나에게 파란을 일으켰다. 단순한 줄 세우기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쭉 그렇게 해 온 것들 즉 당연한 것들에 대해 그게 당연한가요? 묻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 던지는 동료는 순식간에 우리가 아니라 그들로 바뀌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다. 두려움은 회피를 가져왔다.
이 책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느낌이 아닌 통합적인 방식의 앎, 그 앎을 통해 민주주의의 복잡하고 도전적인 질문들을 품어내는 근원적인 것임을 이야기한다. (p.108) 그러면서 비통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글귀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적이든 사회적이든 비통함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 교사들은 모두 그 비통함 한 가운데 있으리라. 좋은 사회는 자유와 규율 사이, 헌법에서의 자유의 축복과 법의 지배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출현하며, 최상의 결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립의 해법으로 얻어진다고 한다. (p.130)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며, 학부모는 학교를 신뢰하는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학교로 다시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앞에서 이야기한 나의 일상에 작은 금이 간 사건으로 인하여 작은 것에도 의심하고 질문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민주주의, 이 책의 단어로 말하면 마음의 습관에 대해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장난감을 가져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회에 나가면 경쟁할 텐데 학교에서 이렇게까지 협력해야 할까요? 난 스티커를 도저히 버리지 못하겠는데, 버려야만 하나요? 버리게 되면 무엇으로 아이들을 보상하나요? 어떤 수업이 좋은 수업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 반에 아무것도 안 하는 학생과 타협해도 될까요? 등 수많은 질문들을 동료들과 나누게 되었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도 하고 서로가 생각하는 정답을 말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우리는 그 질문에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려고 애썼다.
선생님, 쉬는 시간에 축구 할 때 맨날 싸워요. 점심때 축구 할 건데 봐주시면 안 돼요? 선생님은 좀 무뚝뚝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 전 선생님과 점심 같이 먹고 싶지 않아요. (매일 1명씩 돌아가면서 밥을 먹었는데, 교직 생애 최초의 거절이었다) 선생님은 왜 저 친구(통합학급 학생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었다)만 예뻐해 줘요? 저도 예뻐해 주세요. 이러한 말들은 우리 반 아이들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금이 아닌 교사로서 내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개학하고 바로 다음 날 발생한 학교 폭력 사건은 그해 여름 7월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3월부터 7월까지 학교에 폭풍이 몰아친 것이다. 퇴직하신 교장 선생님을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그때 참 힘드셨죠라고 물었을 때 몇 년이 지났음에도 교장 선생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민원 앞에 서 계셨다. 우리 반이 있던 5층은 오후가 되면 선후배 교사들이 어슬렁어슬렁했다. 홀로 교실에 남아있는 내가 무사한지 복도 창문 넘어 슬쩍슬쩍 바라보셨다. 화조차 내지 못한 나를 대신 화를 내주고 위로를 건네주었던 따뜻한 동학년은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나를 둘러싼 분들의 힘으로 그 일 년을 견뎌냈다. 그리고 아이들은 졸업했다.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으면서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희망적이고 즐거울 수도 있는 사적, 공적 자리가 필요하다. (p.227) 우리는 너무 바쁘고 일이 많아서 만남을 소홀히 했다. 지금은 안다. 그럴수록 더 만나야 했었다는 것을. 이번 글을 통해 이 책을 4번째 읽게 되었다. 솔직히 난 이책이 어렵다. 다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더더욱 이 책을 가지고 여러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다. 새로운학교경기네트워크 월요광장을 이 책으로 시작한 이유다. 내가 늘 옳지 않다(머릿속으로는 이해하고 있는 명제)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늘 아프지만 소중한 경험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서로 던지는 질문의 수만큼 우리는 서로를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광장이 주말에 열렸다. 검은 물결이 도로를 덮었다. 그 거대한 광장이 이후 작은 광장들까지 연결되기를 소망한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광장 속에서 우리는 아픔을 이야기하고, 들어주고, 맛난 것을 나눠 먹고 서로 기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광장을 열게 된다면 첫 책으로 <비통한 자를 위한 정치학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바로 이 책을 권한다.
2023 여름 호 목차
들어가는글_2023 새넷 여름호
1. 시론
2. 포럼 & 이슈
3. 특집
4. 전국넷
5. 수업 나누기 정보 더하기
6. 티처뷰
7. 이 책 한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