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편지

by 오후세시


나의 할아버지는 군인이셨다. 머리가 비상한 그는 당시 서울대에 진학하셨으나, 1950년 6월 25일 전쟁에 참전한 뒤 군인의 길을 가셨다. 그 후 북에 고향을 두고 내려오신 우리 할머니를 만나 결혼, 슬하에 네 남매를 두었다. 올곧은 그의 가치관으로 자녀들에게 성실함과 배움을 강조하시며 양육하셨다. 그중 셋 째인 엄마는 은행원 시절, 회식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9시만 넘으면 회식 자리에 할아버지가 데리러 왔을 정도로 자녀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아끼고 돌보셨다. 그런 그의 소신은 나의 중학교 졸업식에도 이어졌는데, 당시 밀가루와 계란을 던지며 교복을 더럽히는 문화가 있었다. 이런 문화를 눈앞에서 보고 충격을 느낀 그는 나에게 밀가루를 던지는 나의 지인들을 불러 모아 혼을 내셨다. 물론 나도 혼이 났다. 그날 화가 나신 그의 얼굴이 졸업식 사진 곳곳에 찍혔고. 당시에는 죄송스러웠으나 이 사건은 가족이 모일 때마다 웃음으로 그를 추억하는 일화가 되었다.


화가 잔뜩 난 할아버지, 밀가루 폭탄을 맞은 나, 멋쩍게 같이 있어준 할머니와 작은이모


이렇게 보수적이고 올곧은 자신의 가치관으로 살아온 그는 유독 첫 손녀인 나에게 아낌없이 다해주셨다. 내가 4살쯤 멀리서 달려와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할아버지의 종아리를 와락 껴안았는데, 마침 피고 있던 담배의 재가 내 눈 바로 밑에 떨어졌다. 하마터면 눈에 들어갈 수 있어 큰 일이 날 뻔했지만 다행히 눈은 이상 없었다. 지금은 흉터조차 사라졌으나 당시에는 집이 떠나갈 정도로 내가 울음을 터트렸다고 했다. 엄마, 아빠도 화가 나고 놀랐으나 그 이상으로 이모들과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꾸짖었고, 그의 불같은 성격에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서 계셨다고 했다. 이후 한 번도 끊지 않았던 담배를 끊으셨으니, 할아버지 또한 많이 놀라고 자신의 잘못을 크게 여겼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에는 방학마다 다른 친척동생들과 함께 박물관과 전시회를 데리고 다녀 방학숙제를 완성하였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다닌 적도 많았는데 우리의 코스 중에는 맥도널드 햄버거와 즉석복권이 항상 있었다. 더운 여름, 시원한 콜라와 햄버거를 먹은 뒤 동전으로 긁어 나오는 숫자에 행운을 걸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렇게 500원이 나오면 또 바꿔오시고, 또 500원이 나오면 또 바꿔오시고. 어린아이라고 부리지 않고 자신이 다녀온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는 때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전화가 아닌 편지로 전했다. 처음으로 친구가 아닌 할아버지와 펜팔을 경험해본 나는, 그가 직접적으로 따뜻한 말을 해주지 않아 행동이 무뚝뚝함에도, 그의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일 눈 밑에 난 화상자국


그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이 올라가는 겨울에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후에 무슨 암이었는지 때때마다 엄마에게 물어본다. 간암이었는지, 폐암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나는 이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그의 생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무력감과 죄책감이 뒤늦게 밀려왔기 때문일까. 암을 발견하고 여러 차례 항암치료를 하던 와중 우리 집에도 잠시 머물렀었는데, 앙상하게 말라버린 그의 손을 잡고 속으로 기도하는 것조차 큰 용기였다. 고등학생이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천천히 죽음과 가까워지는 할아버지의 미래도 지금도 어찌 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돌아가신 뒤 학교 축제에 할아버지를 주제로 시를 쓰기도 할 만큼 내 삶에 그를 잘 애도하고 출연시켰으나, 사실 애도하는 척으로 무마하고 싶었던 감정들이 이내 잘 덮이지 않았다. 최근 [명량한 은둔자]를 쓴 캐럴라인 냅의 책을 읽고 있다. [드링킹, 그 치명적인 유혹]이라는 책이 더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은 그녀의 전반적인 삶의 고통을 잘 다루고 있다. 책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깊은 사랑은 이토록 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어른이 된 뒤 대부분의 기간에 이런 강렬한 감정에 따르는 위험을 피하려고만 꽁지 빠져라 애써왔다는 사실을,
개가 내게 주는 깊은 즐거움이 언젠가 그만큼 깊은 고통으로 바뀔까 봐 두렵다.


잠깐 부가 설명을 하자면, 그녀는 부모를 떠나보내고 자신의 반려견에 집착일만큼 강박적으로 헌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반려견을 향한 자신의 강박이 이내 어떤 감정일지 다뤘다. 상실과 애도에 빠지지 않으려 처절히 노력하는 회피적 모습과 외면하였던 상실을 다루게 될 때 느끼는 괴로움, 그리고 그 안에 일어나는 마음들을 이 책에서는 잘 나열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은 그동안 애도하는 척을 한 것이지 애도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전한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안다. 나 또한 할아버지를 애도하고 내 마음속에 잘 떠나보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척을 하고 있었다는 걸 못내 깨달았다. 이 책은 96년도를 전후로 쓴 글귀이며, 나는 90년생이라 그녀와 나는 세대가 초월된다. 그럼에도 이 책에 살아있는 96년 쯤의 그녀 이야기가 21년 나에게 닿고 있다.

할아버지가 이 생을 떠나는 순간, 그의 사랑 또한 내 삶에 현존하지 못한다는 이기적인 슬픔과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괴로워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편지를 쓰고 읽는 일이 소소한 취미인 나에게, 할아버지의 유품이 되어버린 편지는 읽지 못한 채 애써 외면받았다. 이제 그의 편지를 읽어보고, 텍스트로 남겨보며 느낀 바를 적어보려 한다. 이 연재를 통해 나만의 방식으로 그를 애도하려 한다. 나에게는 할아버지, 누군가에게는 반려견-부모- 형제, 자매-연인-친구가 되는 그 상실의 한 귀퉁이에 먼지를 털어내고, 닦아내며 새로 재정비하는 이 작업은 곧, 이를 회피해왔던 나와의 싸움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가겠다.

이 어렵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의 온기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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