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딸의 퇴근을 도와주기 위해 차를 몰고 나섰다. 라디오에서는 두시의 FM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인순이의 <아버지>다. 가사에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한 번도 안 나오지만 누가 들어도 그 노래다. 회한, 후회, 연민... 이런 감정들이 절절하게 흘러넘친다. 들을 때마다 쓸쓸함을 자아내는 노래다.
내가 미워했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한편으론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 딸에게 나는 어떤 아버지일까? 아버지와 딸의 친밀하지만 남 같은 관계...
꼭 이런 모습을 그리는 드라마도 있다. 넷플릭스에서 몰아보기 하고 있는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다. 가족이지만 남보다 더한 냉랭함과 거리감, 단절감 같은 정서가 흐른다. 뭔가 꼬여있고 의심하고 오해하고 미워하는 공기가 드라마를 보는 내내 기분을 무겁게 한다.
누구보다 친밀해야 할 가족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는 아빠의 존재감은 나만의 느낌일까? 어쩌면 60대 중반의 아빠와 30대 초반 딸과의 일반적 정서가 아닐까 하고 애써 위안해 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살가운 대화는 거의 없다. "배고프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조끔... 괜찮아." 그리고는 이내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곤 눈을 감는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뭐.
수료가 일 년도 안 남았는데 다니던 수련병원을 그만뒀다. 그럭저럭 일 년이 되어가지만 해결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손 놓고 있는 정부도 그렇고 전공의도 그렇고 의대생도 그렇고... 모든 스텝이 꼬이고 헝클어졌다. 앞으로 2~3년은 이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얘네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도 없다. 웬만하면 복귀하란 소리는 더더욱 못한다.
덕분이라고 해도 될까? 그래도 식구들하고 붙어 지내는 시간은 부쩍 늘었다. 엄마랑 친구처럼 조잘조잘 친하게 대화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 내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둘이 충분히 행복해 보여서 흐뭇하게 바라보게 된다.
가끔은 딸이 살짝 눈길을 내게 돌려주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아빠도 아직 여기 있어!" 하고 싶은 마음에 작은 농담으로 대화를 가볍게 틀어보기도 한다. 그러면 딸은 잠시 웃어주다가 곧 다시 엄마와 수다를 이어간다.
이제는 그 조심스러운 거리감조차도 우리 사이의 소중한 리듬이라고 느껴진다. 그렇게 멀찍이 바라보며 사랑을 주고받는 방식도 나쁘지 않다. 이토록 친밀한 사이인데 내가 조금 그늘진 자리에 있으면 뭐 어때.
둘이서 저만치에서 나누는 말 한마디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가 참 대견하다.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때론 대화에 끼어들기도 한다. 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잠시 틈을 주곤 금세 또 엄마와의 대화에 빠져든다.
딸은 이제 어른이 되어간다. 나의 자리도 자연스레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이제는 먼발치에서 그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만 해도 좋겠다. 우리의 특별한 거리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애정의 온기를 딸은 알고 있겠지?
내 얘기라고 하기엔 민망하고 오글거린다. 그래서 남 이야기 하듯이 비틀고 눙쳐서 적어 본다.
#1. 거실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와 딸의 대화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아빠.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엄마와 딸은 요즘 꽤 자주 대화에 빠져든다.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눈치를 보지만 스며들기가 쉽지 않다. 먼발치에서 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 딸이 아빠 쪽으로 한눈을 주면 그제야 아빠는 딸에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인다. 잠깐 미소를 지어 보이곤 곧바로 엄마와의 대화에 다시 몰입한다.
아빠: (작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 "아빠는 그냥 방청객인가…."
#2. 끼어들기
한 번 제대로 대화에 참여해 보기로 결심한다. 여전히 딸과 엄마는 거실에 앉아 이야기 삼매경. 큰맘 먹고 다가가 눈을 깜박이며 너스레를 떤다.
아빠: (눈을 깜박이면서) “깜빡이 넣고 들어갑니다~ 이야, 도대체 뭐가 이렇게 재밌어?" 딸: (살짝 웃으며) “뭐야~이상하게 엄마: “아, 잠깐만!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이었어.”
어색한 웃음. 말없이 자리를 내주며 슬쩍 물러선다. 그래도 어쩐지 뿌듯하다. 두 사람과 잠깐이라도 웃음을 나눈 게 어딘가 싶다.
#3. 질문
조용히 혼자 소파에 앉아 있는 아빠. 딸이 다가와 슬며시 옆에 앉는다.
딸: “아빠, 혹시 아빠 어릴 때 할아버지랑은 어땠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들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아버지와의 서먹했던 시간, 어릴 적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복잡한 감정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잠깐 주저하다가 차분히 말을 꺼낸다.
아빠: “음… 할아버지랑은 참 멀었던 느낌적인 느낌이야. 생각해 보면 나도 아버지를 많이 미워했던 거 같아.” 딸: (조심스럽게) “그런데 지금은?” 아빠: (잠시 침묵) “지금은… 음, 그냥 그때는 잘 몰랐던 거지. 아버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셨던 건데… 그걸 나중에야 알게 되더라.”
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 말없는 공기가 흐른다. 딸이 조용히 다가앉으며 말을 꺼낸다.
딸: “아빠도 나한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흐흐"
#4. 혼잣말
책장에 꽂혀 있는 앨범을 꺼내고는 딸의 어린 시절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딸이 아기였을 때 품에 안겨 졸던 모습, 유치원에서 손 흔들며 바라보던 얼굴,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밝게 웃던 그 미소까지….
아빠: (사진을 보며 중얼거린다) “우리도 이런 시간들이 있었네?”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딸과 조금은 서먹해지는 지금의 시간도 언젠가 추억이 되겠지 싶다. 조용히 앨범을 덮고 허공을 올려다본다.
#5. 커피 타임
딸과 아빠가 드물게 단둘이 차를 마실 기회가 생긴다.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다가 문득 서로 눈이 마주친다.
딸: “아빠, 결혼해서 아이 낳으면 아빠, 엄마처럼 키우고 싶어. 그냥… 그 정도의 거리에서 묵묵히 봐주는 거, 왠지 좋은 것 같아.” 아빠: (놀라며)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네. 아빠가 가끔 멀리서 지켜봐 주는 것도 네가 알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마주 보며 웃는다. 마치 묵묵히 지켜보던 모든 시간이 딸에게 조금이나마 전해진 듯한 기분이다. 한층 더 든든하고 따뜻해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