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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

by 김추억

나는 개구리다. 나는 경칩에 태어났다.
엄마는 겨울을 견디고 계셨기에 나는 엄마 뱃속에서 겨울잠을 잔 것이다.
개구리가 눈을 뜬다는 경칩에 세상으로 나온 나는 꺼벙한 눈으로 한참이나 졸고 싶었지만 꺼벙한 눈이 이내 커다란 동그라미가 되어 두려움에 떨었다.
무시무시한 천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뱀이었다. 뱀의 소굴에서 태어난 개구리에게 꺼벙한 눈의 여유는 사치였던 것이다.

뱀은 어쩐지 개구리를 죽이지는 않았다. 다만 날마다 숨통을 조였다. 그 강한 똬리에서 풀려날 재간이 없는 개구리였다. 어느 날 저수지에 뛰어든 개구리는 그곳에서 자기보다 몸집이 예닐곱 배는 더 큰 황소개구리를 보고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거기서도 있을 곳을 얻지 못하고 뭍으로 나와 밤이슬에 젖어 개골개골 노래처럼 들리는 울음을 불렀다.
울음으로 탈진한 개구리는 저주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뱀을 저주하고 황소개구리를 저주하고 밤이슬을 저주하고 엄마 뱃속을 저주하고 급기야 더 이상 저주할 것이 없게 되자 자기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차라리...라는 말들을 섞어낸 문장들을 날마다 뱉어내다가 더 이상... 더 이상...이라는 말들을 섞기도 했다. 그러다 저절로 독을 품게 된 개구리는 더 이상 꺼벙한 눈도, 놀란 눈도 아닌 독기를 품은 눈이 되었다. 그 눈으로 시비 거는 모든 것들에게 덤비고 덤비면서 하루를 살아내다가 밤이 되면 초주검이 되어 뻗곤 했다. 허무하게도, 공허하게도 뱀은 시간이 알아서 제거해 주었다.
개구리는 그 넓은 세상을 버린 건지 버려진 건지 알 수도 없이 스스로 우물 안에 몸을 던졌다. 우물 안에서 귀를 닫고 눈을 닫으니 마음도 닫혔다. 수면 아래 바닥까지 내려가 고요히 수장되고 싶었지만 부력은 자꾸만 개구리를 살려냈다. 우물벽의 냉기에 기대 울음도 뱉어내지 못하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았다. 바람은 더 이상 우물 안에서 불지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는 누군가의 두레박질도 개구리를 자극하지 못했다.
어느 날 개구리는 눈꺼풀 밖으로 매우 신비한 빛을 느꼈다. 개구리는 뻑뻑한 눈꺼풀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실눈을 조금 떴을 뿐인데 우물의 물이 신비롭고 찬란했다. 개구리는 눈이 부셔서 눈이 멀 지경에 겨우 우물벽을 더듬다가 무심코 올려다본 밤하늘에 그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난생처음 흘려보는 환희와 감격의 눈물! 은하수였다. 은하수는 우물의 하늘들을 빼곡히 채우고 우물의 수면 바닥까지도 흘러내렸다. 개구리의 처연한 눈물까지도 은하수로 만들어 버리고 그렇게 개구리의 온몸에 타고 흘렀다. 모든 독기가 눈물로 빠져나오자 개구리는 자기 천성을 비로소 알았다.​
슬프면 죽을 만큼 슬퍼하는 천성, 기쁘면 미치도록 기뻐서 울기까지 하는 그런 순수한 천성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조금 좋아졌다. 은하수는 그날 밤 흐르지 않고 우물 위 하늘에 멈춰 있었다. 은하수가 새벽 어스름에 다 사라질 때까지 개구리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따금씩 떨어지는 별똥별을 마음에 축복으로 받았다.
다음 날, 내려오는 두레박이 물을 퍼담고 올라가려던 찰나에 개구리는 두레박 안으로 펄쩍 몸을 던졌다. 다시 나온 세상은 누군가 두려움을 걷어가 주었는지 이전과 다르게 아름답게만 보이는 개구리였다. 개구리는 낮에도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고
밤하늘에 자기 안부를 전하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경칩에 태어난 건 하늘의 뜻이다. 내가 눈을 뜨면 봄이 온 거다. 봄, 진짜 본다.
꺼벙한 눈을 뜬 시작이지만 내가 눈을 뜨면 세상이 다 눈을 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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