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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맛

붕세권 개점에 즈음하여

by 나야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은 날이었다. 턱밑까지 옷깃을 여미고 집을 나섰다. 그새 겨울이라니. 평소 수족냉증을 달고 사는 나로선 생각만 해도 무단히 어깨가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목덜미에 차가운 손이 닿자 몸이 제풀에 움찔했다.


별안간 골목에서 냄새가 달려 나왔다. 남편과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세 갈래로 갈라지는 진입로 모퉁이에 작은 포장마차가 눈에 띄었다.


엊그제는 안 보였는데 언제 생겼지?


모르겠고 일단 가보자!


장을 보러 가던 우리는 급한 용무라도 생긴 것처럼 후다닥 차를 세웠다. 포장마차엔 간판이 따로 없었다. 검은 매직으로 씌여진 <붕어빵 2천 원에 3마리> 표시가 그 어떤 네온사인보다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황색 장막 안이 열기로 훈훈했다. 면장갑을 낀 사장님이 빠른 손놀림으로 빵틀에 반죽을 부었다. 팥소를 품은 붕어빵의 몸체가 빵빵해졌다. 한쪽 면을 익히고 뒤집어 새로 익히는 공정이 이어졌다. 지켜보다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이 포장마차는 입구가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언제부터 영업을 시작하신 걸까?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체를 했다.


사장님, 다시 오셨네요!


어제부터 나왔어요. 날이 추워졌잖아.


지난겨울 우리는 오며 가며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근방에서 붕어빵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올 때마다 줄을 서야 했다. 다들 맛있는 건 귀신같이 알아보았다. 붐비는 시간에 잘못 걸려 빈 손으로 돌아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오늘은 뒷사람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주문할 수 있겠네, 아싸아!


인기의 핵심은 역시 맛에 달려있었다. 대기업 베이커리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풍미와 바삭하면서도 쫀득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눅눅해지지 않는 맛의 비결이 궁금했다.


밀가루보다 쌀가루를 듬뿍 넣잖아.

그래서 더 바삭하지.


붕어빵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장님은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말씀을 이어가셨다.


봄에 고관절수술을 하는 바람에 거동이 좀 불편해서.. 그래도 찬바람 부니까 또 나와지대?


아픈 사연을 남 얘기 하듯이 툭 꺼내신다. 어쩐지, 아까부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손만 움직이시더니만. 익숙해서가 아니라 불편해서 그런 거였구나. 옆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남자 어르신이 가스며 냄비 등의 세간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가족인 듯 보였다. 고단한 삶의 무게와 책임이 붕어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퇴근시간이 따로 없어요.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반죽을 다섯 통 가져오거든.

다 팔릴 때까지 굽는 거라.


붕어빵 장사도 예전 같지 않다는 기사들이 종종 올라온다. 팔아봤자 남는 게 없다고. 오죽하면 붕어빵에 역세권을 더해 '붕세권'이란 말이 나왔을까. 이분들이 모진 세파를 이겨낼 수 있도록 경기가 회복되고 물가도 뜀박질을 멈추었으면.




고소한 붕어빵 냄새가 번져갈 때쯤 손님이 들어왔다. 길 건너 커피숍 사장님이었다. 붕어빵 4천 원어치를 주문한 그는 별도의 예약을 걸었다.


돈통에 4천 원 넣었고요.

붕어빵은 나중에 저희 알바생 퇴근할 때 주세요.


알바생을 위해 미리 계산하고 가는 사장님이라니. 따뜻한 손난로를 건네받은 기분이었다.


알바생이 6시쯤 마치거든요. 그때 들렀다 가라고 할게요. 퇴근할 때 챙겨주세요.


우리도 곧 붕어빵을 받아 들고 차에 올랐다. 확실히 아까보다 덜 춥게 느껴졌다. 무릎 위에 올려진 붕어빵 덕분이겠지.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당분간 추위가 지속될 거라고 했다. 머지않아 혹독한 한파가 몰려오겠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할 것 같다. 이 거리엔 시린 겨울바람을 녹이는 마음들이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으니까.


계절을 완성하는 맛, 겨울엔 역시 붕어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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