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으세요, 건강을 양보하지 마세요.

이제서야 깨닫는 식사의 의미

by 홍고롱

1시간 남짓 한 점심시간, 누구와도 함께하지 않는, 오롯한 나만의 밥.

붐비는 푸트코트를 지나 혼자 꾸역꾸역 밀어 넣는 한 끼를

외롭지 않은 척, 고상한 척,

천천히 씹었다.


바로 회사로 들어가면 눈치가 보여 소화가 안 되니

회사 주변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1년이 넘는 시간들.

점심이란 나에게 빠르게 해치워야 하는 한 끼에 불과했다.





퇴사를 하고 무한한 시간이 주어졌는데,

막상 뭘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렇게 흩어져 버리면 또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채우겠다 다짐을 안고서,



시장에 출몰한다.

막상 가보면 세상 사람 여기 다 모여 있는 듯 붐비는 좁은 골목, 활기찬 풍경

“사과 5천 원!” “이런 식으로 장사하시면 안 되죠!”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나는 리틀 말순(우리 엄마)씨처럼 시장을 누빈다.

가끔 젊은 상인들을 보면 대단하단 생각이 들고,

반쯤 젊은 내가 돌아다니면 어머님들이 예쁘게 봐주시는 맛에 자주 들르게 되는.


현금 3만 원을 손에 쥐고 참기름 9천 원, 새우 1만 원, 양파 3천 원, 파 2,400원. 알뜰하게 장을 보고 있었는데 양배추가 4천 원이다. 나는 분명 저번에 3천 원에 샀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최저가에 목숨 거는 나는, 결국 양배추를 포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족발이 눈이 들어온다.

양배추는 천 원 오르면 못 사지만, 족발은 못 참지.

'고추 2천 원'이라는 팻말에 "혹시 천 원원 치는 안될까요?" 하면

"되지!'" 하며 이천 원만큼 얹어 주시는 이 정을 어떻게 놓을 수 있겠냐며.


시장에 가면 눈, 코, 귀, 입까지 즐겁지 아니할 수가 없다.


분명히 가볍게 나섰는데,

양손 무겁게 낑낑대며 집에 도착하면

또 쉴 틈이 없다.


양파 손질, 파 손질, 브로콜리 삶아서 데치고(너무 삶아서, 흐물흐물하기 있기 없기),

과일은 베이킹 소다로 뽀독뽀독 씻고 말려 냉장고에 차곡차곡, 레몬수를 만들겠다고 씻고 갈고 냉동분리작업까지.


손질하는데 하루가 다 갔다.

이럴 때 드는 생각은

"이런 걸 엄마는 어떻게 다 한 거야?"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은 끄떡없겠군"


주부의 삶은 분명히 멋진 삶이다.

이건 다 내가 백수가 된 덕분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영영 이 소중함을 알지 못했겠구나 싶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늦은 저녁, 일을 마치고 온 나는

고양이들 밥을 챙기고,

빠르게 배부를 수 있는

배달 음식, 밀키트, 외식이 아니고서는,

굶는 게 낫다며 스스로를 교육시켜 왔는데,


요즘은 일어나면

아침엔 뭘 먹을까? 점심 때는 치아바타 빵에 루꼴라, 토마토, 부라타 치즈를 넣어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어야지.

저녁에는 가볍게 먹어야 하니 양배추에 계란을 부쳐먹을까? 아니 토달볶을 해 먹을까?

즐거운 선택 장애가 온다.


내가 먹는 한 끼를 위해

정성스럽게 재료를 손질하고 예쁜 그릇에 담아 든든하게 먹은 뒤,

“역시 요리의 끝은 설거지지”라며 따뜻한 물에다 뽀득뽀득 그릇을 씻는 느낌이란..



알고 보니 나는 집안일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간이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들을 고르고 골라, 내 입맛대로 간을 맞추고,

건강하게 먹는 한 끼의 즐거움을 이제서야 깨닫다니!


원래 못 먹던 '고수'도 시도해 볼 여유가 생겼고,

낫또는 36년 인생에 처음 맛보고는 낫또 매니아가 되어버렸다.

매 저녁이 낫또가 되어버렸다는 웃픈 현실.


건강은 이렇게 찾는 거 아니겠어요?:D






사실 이렇게

먹는 것에 있어서도 자극을 덜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엄마는 3년 전 폐암에 걸려 수술 후 한 차례 식단을 바꿨고,

올 2월 내 가장 친한 친구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회복 중이다.


매일 스트레스로 맵고 자극적인 것만 찾던 나

(어느 정도냐면, 아침마다 점심을 빠르게 때우려고 가는 김밥집에서 매일 땡초김밥을 주문했더니, 사장님이 땡초 김밥이 맛있냐 물으신다. 일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는 말에, 원래는 땡초를 두 개 넣어주시는데 나한테만 매 번 세 개를 넣어주시며, 스트레스 빨리 풀리라고 하시는 사장님 덕분에, 나는 눈물 콧물 흘리며 점심시간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렸다. 감사했어요 정말:)

면역력이 급속도로 떨어진 것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이전에 퇴사 때와는 달리, 회복에 대한 열망이 들끓을 수밖에.

나도 나이를 먹고,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하니

이제는 나도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최근에는 주에 2번 친구와 같이 등산 후 건강한 한 끼를 만들어 먹었다.

가끔 소소한 일탈로 시장에 가서 팥 들어간 쑥떡을 들고는 그렇게 행복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흘려보낸다.



일도, 돈도, 사랑도 결국 건강이 없으면 빈 껍데기, 백지수표에 불과하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 짧은 인생을 작고 단단한 행복으로 버텨내고 싶다.

손 꼭 붙들고 봄이면 벚꽃 보고, 여름에는 수박 먹고,

가을에는 단풍 아래 막걸리 한 잔, 겨울에 난로 앞에서 귤 까먹으며 웃고 싶다.

그 모든 시간을 함께하려면 나는 건강하게 늙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도, 내 사람들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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