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고 대답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도 가끔 자신을 가꾸고 싶으셨던 날이 있으셨던 것 같다.
엄마 화장품에서 몰래 훔쳐 바르던 립스틱은 그중에 젤 압권이었는데 암만 티 나지 않게 발라도 늘 엄마한테 들켰고,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어서 립스틱을 사용하고서야 엄마를 절대 속일 수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립스틱이 너무도 연한 제품이라 입술 주름까지 기가 막히게 남겨지고 또 때론 미처 다 돌리지 않고 뚜껑을 닫아버려 구겨져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을 당하던 흑역사의 시절도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처음부터 할머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할머니는 시골에서 사신 삶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냥 손주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여자가 아닌 할머니로만 사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진짜 화장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 방의 앉은뱅이책상 위엔 뭔가 바를만한 것은 동동구루무와 물파스 밖에 없었고, 그나마 삼복더위에 우리와 함께 풀물이 까맣게 든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시는 것이 전부였다.
그랬던 할머니 방에 고모가 사다 준 메뉴퀴어가 생겼고 할머니는 아껴 아껴 쓰신다며 세워만 두셨는데 호기심 대장인 나를 비롯해 어릴 적부터 멋 내기에 관심이 많았던 여동생의 손을 탄 메뉴퀴어는 하도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바람에 금방 굳어졌고, 지울 수 있는 리무버 액도 없었기에 방구석구석엔 주황색 메뉴퀴어가 묻은 데다 방을 가득 채운 메뉴퀴어 냄새는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작약꽃 씨방
"이 마한 것들. 이래 저지레를 이렇게 해 놨네. 뭐가 남아나는 게 하나도 엄써 고약하기도"
할머니가 인상을 쓰시며 양쪽 방문을 여셨다.
나는 메뉴퀴어 액을 덕지덕지 묻혀 놓은 여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할머니 눈치를 보고 있었고, 동생은 그런 나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손톱이 자꾸 깨진다고 느 고모가 사다준긴데 이래 다 못쓰게 해 놨네. 늬들은 언나 손톱이라 이런 거 바르믄 못써. 담엔 할머이 물건에 손대지 마래이"
할머니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할머이 내가 낭중에 커서 돈 벌면 메니퀴 마이 사줄게"
"마한 것 말이나 못하믄. 오이야 돈 많이 벌어 내 메니퀴 사준나. 그나저나 내 그때까지 살 수나있을꼬?"
어젯밤 우리 사 남매는 할머니와 함께 봉숭아 물을 들인다고 손톱에 꽃잎을 덮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손톱엔 한 개의 꽃잎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고추장물에 손가락을 빠뜨렸다가 나온 듯한 나의 손톱색 대신 언니의 열손가락은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퉁퉁 불어 있었고, 작고 하얀 손톱엔 마치 잘 익은 꽈리 같은 예쁜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며칠 뒤 우리들의 손톱엔 각기 다른 색을 한 붉은 물이 자리 잡고 있었고 마당에서 땅따먹기를 하던 우리를 보고 할머니가 부르셨다.
"내 메니퀴 발라줄까?"
"할머이 메니퀴 또 사 왔어?"
"그라믄 사 왔지. 자 보래이"
할머니는 담벼락 밑에 있던 작약꽃 씨를 하나 떼서 꾹 하고 눌러주니 그 안에서 끈끈하고 맑은 액체가 흘러나왔는데 손톱에 살살 발라주니 마치 투명 메뉴퀴어처럼 손톱이 코팅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죄다 손등이 보이도록 양손을 펼치고 할머니 앞에 줄을 서 있었고 갑자기 들마루는 그 시절의 네일숍이 되었다.
"너 이거 뭔지 알아?"
"불가사린가? 아닌데 여기 봄에 꽃 폈었는데"
"너 이거 메뉴퀴어 되는 거 모르지?"
내가 작약꽃 씨방을 가리키며 작은 아이게 묻자 아이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아 진짜래니. 함 볼래?"
씨방을 하나 따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보라 하니 질색을 하여 내 손톱에 살살 바르며 보여 주었더니 그제야 이해를 하고선 웃었다.
"엄마 그 시절에 이미 이렇게 네일아트 연습을 하며 놀은 거야? 근데 이거 알레르기 생기거나죽는 건 아니지?"
헙. 알레르기. 그건 미처 생각 못했다.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지내온 거 보면 아주 나쁜 성분이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
그리고 진지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할머니한테 진짜로 메뉘퀴어를 사다 드렸는가에 대해. 다행이다. 사다 드렸었다. 투명색으로. 물론 할머니가 투명색 메뉘퀴어와 티눈액을 헷갈려하셔서 웃었던 것도 떠오르는데 왜 갑자기 슬픈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