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뜨락 심리상담후기
극도의 공포감, 멸절
마인뜨락 심리상담후기
나: 어서 와요. 잘 지냈나요?
내담자: 네. 잘 지냈어요. 공부도 좀 했어요!
나: 오 오자마자 반가운 소식이네요. 공부하기 편했나요?
내담자: 완전 잘 세운 계획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을 써놓으니 좀 편했어요. 학교 준비물이나 친구들하고 놀 때 챙겨야 하는 것들도 까먹지 않고 잘 가지고 갔어요. 처음이에요!
나: 이렇게 잘 챙겨간 게 처음이군요. 좋아하는 내담자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오늘도 다음 주에 챙겨야 할 것들을 작성해 볼까요?
내담자: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나: 오, 나에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보네요. 당연히 내담자가 원하는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내담자: 그래도 괜찮아요? 선생님이 원하는 게 저의 이야기인가요?
나: 재차 확인하는 모습은 처음인 것 같은데요. 당연히 나는 내담자의 이야기가 듣고 싶죠.
내담자: 좋아요.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나: 음.. 잠시만요. 조금만, 저에게 아주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을까요? 이유도 금방 이야기해 줄게요.
내담자: 네.
(약 30초 정도 정적)
나: 좋아요! 기다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방금 내가 한 생각은, 당연하게도 내담자에 대한 생각이었어요. 재차 확인하는 부분이 마음에 걸려서요. 혹시 이 부분을 먼저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내담자: 엇.. 네.
나: 아니면, 내담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해도 괜찮아요. 편하게 먼저 이야기해도 좋아요.
내담자: 아 그게 아니라, 오늘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그 부분이거든요. 좀 불안해서요.
나: 오.. 같은 부분이네요.
내담자: 선생님은 정말 눈치가 빠르네요. 겉으로 보기에는 크고 포근한 느낌인데, 선생님의 정신과 마음은 예리하고 날카롭고 빠른 것 같아요.
나: 하하.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죠?
내담자: 네. 선생님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서 이야기했어요. 놀리는 것 같이 들렸어요?
나: 일단 나를 칭찬해 줘서 고마워요. 기분이 좋네요.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놀리는 것 같이 들린 건 아니랍니다. 오히려 일부로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냐도 다시 물어본 거예요.
내담자: 왜요?
나: 이제 자세히 이야기를 해봅시다. 내가 내담자에게 다시 물어봤을 때 느낌이 어땠나요?
내담자: 아.. 음.. '내가 한 이야기가 선생님을 불안하게 했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나: 바로 그 부분이에요. 내가 내담자에게 느꼈던 부분입니다. 내가 원하는 게 내담자의 이야기인지를 물어봤잖아요. 그때 내가 '내담자가 나 때문에 불안해졌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죠. 그래서 잠시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던 거예요.
내담자: 아.. 전혀 몰랐어요. 생각도 하지 못한 부분이에요.
나: 그럴 수 있고, 충분히 이해합니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전혀 인지하지도, 인식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했는데, 같은 부분을 이야기하게 되었네요.
내담자: 네 맞아요. 선생님께서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몰랐을 거예요.
나: 그럴 가능성이 있죠. 하지만 내담자는 지금 나를 만나고 있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도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맞춰준 적이 있었나요?
내담자: 음. 지금 딱 생각나는 사람은 부모님인데요. 음.. 가만 생각해 보니 친구들이나 다른 선생님들한테도 그렇긴 하네요.
나: 음. 그렇군요. 지금은 내담자가 스스로에 대한 생각이나 가치관, 도덕성 같은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지내기 위해 어느 정도 맞춰나가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중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때로는 타인에게 맞춰서 살기 위해 내담자 자신을 보호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혹시 내가 이야기한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내담자: 그냥 듣고 있었어요. 음.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그게 편하니까요. 하지만 그게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잘 맞춰주면 저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일은 없거든요.
나: 맞아요. 그럴 수 있어요. 조금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것 자체가 힘들지 않나요?
내담자: 아!... (울먹거리면서) 힘들긴 해요. 맞춰주는 행동이 저를 힘들게 하는 거였네요. (눈물을 머금고) 진짜 몰랐어요.
나: 울어도 괜찮아요. 충분히 울어요.
(약 2분 정도 소리 내지 않고 흐느끼는 내담자, 그 소리를 제외하면 시계소리만 들린다.)
내담자: 선생님. 그런데요.. 저 지금 그림 그려도 될까요?
나: 울다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 졌네요.
내담자: 네. 지금은 잠시 선생님한테 저를 맞추지 않을게요. 그걸 깨닫고 나니까 힘들어졌어요. 좀 많이요. 그런데 저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제 행동에 대한 부분이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다음 주에 마저 할 수 있을까요?
나: 와! 이렇게 이야기를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바로 지금처럼, 꼭 내담자를 모든 사람에게 맞출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하나만 더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약간 꼰대같이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내담자: 이야기해 주세요. 괜찮아요.
나: 내담자와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들이 내담자를 좋아해 주거나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내담자가 거울을 보면, 거울 안에 보이는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 어떤 모습이어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보이는 대로 사랑해 주세요. 나랑 약속할 수 있을까요?
(내담자는 펑펑 운다.)
내담자: 제가 너무 울었네요. 한 번 제 자신을 사랑해 보려고 노력할게요.
나: 고마워요. 이것만 약속하면 오늘 상담은 마쳐도 될 것 같아요.
내담자: 네 약속할게요. 아, 대기실에서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나: 괜찮아요. 다른 내담자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볼 수도 있는데, 괜찮을까요?
내담자: 상관없어요. 제가 그림을 그리고 싶으니까요.
나: 오늘 상담 진국이네요. 수고 많았어요. 다음 주에 이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해요.
내담자: 네. 오늘도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시작점이지만, 생명의 탄생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라는 말이다.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의 아기들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이미 자신과 엄마는 하나라고 생각을 한다.
태어나기 전의 아기들은 그런 존재이다.
그렇기에 뱃속의 아기들은 자기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엄마를 먼저 인식하게 된다.
자아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아가 생기기 이전에 엄마를 먼저 인식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왜 나오냐 하면, 도날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에 의하면, 엄마는 아이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 자기와 거짓 자기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이다.
첫 거짓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상담 10회기,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이유'에서 잠시 언급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참 자기'란, 타고난 기질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참 자기'가 보호되지 않는, 어렵고 힘든 환경에 놓였다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원래 나의 모습인 '참 자기'를 감추게 되고, 세상 또는 타인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거짓 자기'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이 절대적으로 엄마에게 의존하게 되는,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인 뱃속에서부터 자아가 생길 때까지, 이 시기에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되면 아기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걸 '멸절(annihilator)'이라고 한다.
나는 내담자와의 대화에서 이 부분을 느낀 것 같다.
충분히 좋은 엄마는, 이런 경험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해야 하는데, 아마도 내담자의 엄마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내담자와 상담을 하면서 도날드 위니콧이 먼저 떠오르지 않았나 싶다.
충분히 좋은 엄마 대신, 충분히 좋은 상담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였던 것 같다.
상담 7회기에서 다룬 '충분히 좋은 상담사'
다음 시간에 극도의 공포인 '멸절'이라는 부분에 대해 내담자와 깊이 있는, 심도 있는 상담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