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제 Sep 04. 2024

EP3. 안정을 위한 불안정함

자발적 프리랜서의 시작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선택을

개수로 표시한다면 과연 몇 개일까?


방대한 숫자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찰나,

주일 남짓 과거를 올리며

당신 앞에 주어졌던 무수한 선택과 결과 짚어보자.


나는 '선택'이라는 개념조차 형성되지 않았을

영·유아 시절부터 수많은 선택을 마주해 왔다.


아마도 제대로 된 첫 번째 선택은 '돌잡이'가 아닐까 싶다.


부모님의 희망사항은 예상컨대

학업을 잘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연필을 집길 바라셨을 거다.


그러나 부모님의 희망은 희망사항일 뿐,

나는 마이크를 집었다고 한다.


이가 자라 목소리가 큰 간호사이자 라디오 디제, 프리랜서 성우로활동했는데 

어쩌면 그 마이크를 집었던 것이

어떤 클리셰로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글을 시작하는 극적인 요소로

사용하고 싶었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시절 나는 어떤 이유로 마이크를 집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분명 어린 내게도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사소하지만) 기억에 남는

선택은 언는지 떠올려 보자


초등학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의 사정으로 이사를 자주 다녔었고 전학도 잦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등학교 1학년에게는

나름의 큰 스트레스였고

마지막으로 전학 간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싶단 마음이 컸다.


세 번째 전학이 결정되고 첫 등교하기 전날 밤

나는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할지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였다.


나는 특별한 날이나 가족 행사 때 입고 가는

흰색 레이스가 가득한 원피스가 입고 싶었다.


행여 옷이 더러워질까 어머니는 반대하셨고,

나는 떼를 썼다.


그러다 들어주지 않으니

전학을 다니며 힘들었던 점을 토로했고

울며불며 어머니를 설득했던 생각이 난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의 설득에

정말 설득되어 허락하셨다기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컸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 

결과 성공이었고

그렇게 무사히 등교할 수 있었다


흰색 원피스가 예뻐서였는지,

아니면 흰색 원피스를 입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학교생활은 원만했다.


물론 원만치 않은 학교생활이라 하였을지라도

그 흰색 원피스를 탓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날의 내게 깨달음을 주었던

소중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떼쓰기보단

나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작은 꼬마에겐 큰 소득이었다.


단순히 전학 첫날의 복장을 고르는 선택 지나

인생의 큰 갈래를 결정하는 선택들도 있었다.


내 인생의 중요했던 선택 하나를 묻는다면 16살,

중학교 3학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앞서 꿈이 생기고

진학하는 계열을 정하시기였기 때문이다.




세상은 돌봐야 할 일이 많아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가족들이 내 꿈에 관심이 많았다.

굳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 남은 어머니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어머니는 내게 '네가 원하는 걸 해'라고 말했지만

언제나 눈물이 톡 하고 떨어질 것만 같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간호사가 되기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가려했던 나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손가락질받아야 했다.


서럽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으나 친척들의 이야기는
굳이 언급하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엄마를 설득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지원해 주면

대학교 때부터는 학비를 포함

생활비는 알아서 충당하겠노라고.

학교 다니는 것도
그저 급식비와 참고서 살 정도의 용돈만 받아도 된다고.


평생 엄마를 원망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사실 그때 '이기적'이라는 이야기가 기분 나빠서였는지

정말 내 꿈을 이루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내 의견을 존중받아

보란 듯이 대학을 졸업해 간호사가 되었다.


그 이후의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대체로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비교적 더 괜찮아 보이는 일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

혹은 안정적인 길을 선택해 왔던 것 같다.


그 결과는 선택해 보기 전에 모르는 거라지만

예상되는 결괏값 중 어느 것이 더 나을지 늘 고민했다.


대학을 진학하면서도

첫 취업하는 병원에 지원하면서도

나는 늘 80% 정도로 노력하면 되는 안정적인 길을 선택했고

'불합격'이란 단어를 피하려 부단히 노력해 왔다.


나의 치기 어린 설득력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싶었으나

어느 정도 성공, 아니 실패하지 않는 길이 보장된 길만 선택했기에 당연히 퇴화된 기능처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동안의 선택도 설득도 욕심도

모두 나와 가족의 안정을 위한 것이라 여겼고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8년간의 병원 경력을 내던지고

병원을 나와 불안정한 고용 시장에 나를 다시 내놓은 것은

흡사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고 있어

당근을 흔드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니고서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상황이었다.


당시 내 나이는 서른 하나.

앞자리가 바뀌고 나서 삶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지만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


가끔 심한 두통이 있어

신경과 진료 시 CT를 찍어보긴 했으나

신경과 과장님과 서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타이레놀 650mg 알약을 5일분 처방받는 것이 전부였다.


간호사가 전문직이라고는 하나

다른 특별한 기술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스푼라디오 DJ활동과

크몽 성우로서 간간히 취미생활을 즐기며

책을 읽고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는
30대 초반 여성이었을 뿐이다.


측근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넌 말도 잘하고, 사람들과 관계도 좋으니까 뭘 해도 잘할 거야." 했던 말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걸

알게 된 시점이 있었다.


공시생 신분을 지나
아르바이트 겸 시작한 원고 작가일을

점차 늘려가기 시작했고

다른 일을 시도해보기도 했으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직무를 배우는 것이 문득 두려웠다.


모아놓았던 현금도 점점 줄어드는 마당에

불안은 더욱 증폭되었고,

어디서부턴지 모르게 시작된

탕후루 열풍에도 단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었던 내가

급기야 탕후루 가게 알바 지원하기도 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세요'

문자를 받고도 기쁘지가 않았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는 걸까 라는 생각과

다양한 구직사이트에 들어가 시급을 확인하면서

점차 내 불안은 쌓여갔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경기도에 거주하며 내가 답답했던 건

단지 많은 사람, 차, 건물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의 내가 가장 답답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

그나마 좋아하고 잘한다고 여기는 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나.

그런 내 모습과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불안정함 속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어딘가 솟아날 구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매 번 '이게 맞나?' 하며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를 위해 불안정함 속으로 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존재였기 때문에.


확실한 성공을 위해서도 아니다.

아무런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자

그저 내게 주어진 불안정함에 적응하는 것이

가장 안정을 위한 길이었다.




참 아이러니 한 말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누구든

한 번쯤은 느껴봤을 것이다.


내 삶을 송두리째 어딘가로 내친다는 느낌 보다

'이젠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라는 마음가짐.


그렇다고 무언가를 죽기 살기로 실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마음가짐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혹시나 이 감정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한번 생각해 보자.


집을 사기 위해 은행에서 나의 신용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대출금이나 대출이자를 상환한다.


물론 큰돈이니만큼 아무런 계획 없이

대출을 감행하진 않겠지만 삶의 안정을 위해

내 집 마련을 꿈꾸며 행동한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나는 돈이 아니라

인생의 선택을 대출받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열심히 갚아나가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조차 일감이 줄어들거나

혹은 일이 너무 많아 잠이 줄거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여전히 불안해하기도 한다.


'저는 제 선택을 믿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요'라는
허구한 날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입에 바른 소리는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다.


하지만 이미 선택을 대출받은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니 매일처럼 걸어야 하고.

괜찮다면 가끔 뛰기도 해야 한다.


프리랜서가 아닌 누구라도

비슷한 모양새의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지내서 손해 볼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당신의 불안정함도 함께 응원한다.

(응원하는 건 자유니까)


삶이 여전히 불안정함 투성이인 나의 위로라도 괜찮다면,

상습적 선택 대출자의 위로라도 괜찮다면,
오늘 하루는 잠시라도 마음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화


자발적 재택근무의 시작 EP5. 후천적 J

이전 02화 EP.2 커튼 없는 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