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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Sep 11. 2024

EP4. 후천적 J (feat. 세상의 모든 J에게)

자발적 재택근무의 시작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언제부터 혈액형을 묻는 풍습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던가 싶다.


유행하는 것은 왠지 뒤떨어지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로

검사도 하지 않은 채 지내온 지 어언 1년쯤 지났을 때,

이제는 MBTI를 모르면 대화가 어렵다는 판단하에

쭈뼛거리며 검사를 진행했다.


인터넷을 통한 간이 검사였으나

제일 처음 검사 결과로 나왔던 'ENFJ'는 지금까지 굳건하다.

중간에 검사가 업데이트되면서

이제는 퍼센트까지 보여준다.


지금은 예전만치 대화의 당연한 소재거리가 아니긴 하지만

어색함을 푸는 아이스브레이킹용으로는

여전히 손색이 없다.


나는 전형적인 ENFJ다.

또 다르게 표현하자면 중간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사회적인 동물로 지내기 위해서는

어딘가 뾰족한 부분을 가진 것이
상당한 단점일 수 있지만

의외의 부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질 때도 있다.


'그래서, 제제 작가.

당신도 그저 그런 MBTI에 관한 글을 쓰고 싶은 겐가?'

물론 아니다.


계획형이란 성향에 관해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싶을 뿐 '그저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뒤로 가기를 누르려거든

한 문단만 더 읽어보길 권한다.




2024년 09월 11일 오늘 자 MBTI 검사 결과


'후천적 J'라는 글을 위해 당일 검사를 진행했다.


당일 배송, 당일 도착, 당일 제작이란 말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나도 따끈따끈한 당일 검사 결과를 가져왔으니

조금은 매력적인 글로 여겨주면 더할 나위 없겠다.


ENFJ-T, ENFJ-A 그 언저리 어딘가를 전전하고 있지만

언제나 내 그래프는 지그재그다.

연결점을 찍어본다면

각도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수준이다.


소위말하는 '파워 J'인 셈인데,

중고등학교 내내 써왔던 스터디플래너나

입시 계획, 이후 업무 일정을 조율하는 등

To do list를 만드는 것이 취미다.


무리의 한 명쯤은 있는 계획형 인간의 공통 업무인

여행계획 세우기는 당연 내 담당이었고

나 역시도 내가 계획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난 2년간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내가 나를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계획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 없는 것이 싫은 사람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어떤 합의점도 없었다.


완고한 고집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보다 쉽게 꺾이기 일쑤였고

계획을 세우는 일 자체에 피로를 느끼는 일이 잦아졌다.


굳이 말하자면 선천적으론 P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에 맞춰

능동적으로 선택을 조율하는 일을

즐길 수만 있다면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내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음에 큰 불안감을 느꼈고

계획이 틀어져 시간을 낭비하거나 감정을 소모하거나,

어버버하며 순간 패닉 상태에 빠지듯

멈춰버리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그런 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 또한

내게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앞장서서 계획 세우기를 고집했다.


일례로, 과거에는 집착에 가깝다시피 계획을 세웠고

여행의 시작은 계획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핑계를 들먹이며

A, B, C 안을 세워놓기도 했다.

(물론 함께 여행 가는 사람의 피로도를 고려하여 A 안만 보여줬다.)


누군가는 피곤하게 산다며 고개를 젓기도 하겠으나

막상 여행 중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긴 여정에서

갑작스레 빗방울이 떨어졌을 때를 상상해 보자.


"그럼, 주변에 실내에서

시간 보낼 수 있는 곳도 있던데, 거기 가볼까?"라는 말

고깝게 들릴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주변의 실내 코스를 2~3곳 정도 추려놓고

휴무일, 입장료, 운영시간 등을 찾아놓는 것 또한

계획의 일부였.


실제로 갑자기 비가 와서

"주변에 갈 만한 곳 찾아볼래?" 하며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고

때로는 불평불만을 들어야 하는 일보다

덜 수고스러웠기에 자원했던 일이다.


타인의 편의를 충족시켜 주었기에

착하다, 부지런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나는 결국 '나의 편의'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




경기도에서 지내며 삶에 대한 회의감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 모든 순간을 마주하며

나는 강박적인 사고에 깊이 빠져들었다.


모든 것을 더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진행했던

어리석은 내 탓으로 돌렸고,

내 탓을 하면서도 '대체 왜?'라는

분노가 생겨도 풀어낼 대상이 없으니

속으로 앓고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누가 일을 잘하려고 쉬어? 쉬는 건 그냥 쉬는 거야."


수확 없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선상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나에게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었다.


취지는 오랜만의 안부를 묻기 위함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내고 있다는

자존심을 부리기 위해서

바쁘지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려고

쉬는 시간도 가지며 지내고 있다는 말에

지인이 의아하다는 듯 대답한 것이다.


조급한 내 마음에 불을 지피듯이

전해준 좋은 소식에도 마냥 웃으며 축하할 없는

못난 어른이고야 말았다.


한동안 그 화살이 내 마음에 박혀있었으나

바쁜 일상을 살아내야 했고,

생계형 프리랜서였기에 멈출 수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평소처럼 모니터 속 활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바깥세상은 여름이 훌쩍 지나있었다.


분명 푸르기만 했던 창가 풍경이었건만,

다채로운 색으로 변하는 순간 관찰하지 못한 채

앙상한 가지들이 남아있는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니, 맞이한 적은 없으니 정정하도록 하자.

추운 겨울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도 자연을 좋아하던 내가,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는 시간 동안

집 안에서 창밖 세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적잖게 충격적이었나 보다.


'바다 보러 가고 싶어..' 갑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을 챙겨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1박을 한다면 어디서 자야 하는지....


자연스레 생각하고 계획해야 할 일부터 그려졌으나

지킬 앤 하이드라도 된 것처럼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지며

유리잔을 놓쳐 바닥에 았을 때

그 파편 조각이 흩어지듯 생각의 문부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계획도 없이

[겨울바다]를 그리며 출발하기로 했다.

인생에서 딱 한 번 갔었던 강릉의 여름 바다가 떠올랐고

지갑과 차 키, 핸드폰, 핸드폰 충전기 하나만 챙겨 집을 나섰다.


일단 경포대로 향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동을 켜자마자 내비게이션으로 손이 갔다.

그런데 웬걸?

그 돋보기 모양 역시 꼴 보기가 싫졌다.


아무런 조작도 하지 않고 드라이버 손잡이를 D로 옮겼다.




당시 살던 집에서 경부고속도로로 향하는 IC로 나가려면

10~15분 정도면 충분했겠으나

자주 가던 길도 차선을 잘 못 타서 돌아가야 했고

길을 헷갈려 같은 사거리를 세 번이나 마주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황이 조급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몇 번이고 지나갔던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내 모습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정해진 것이 없으니 도착 시간도 필요치 않았고

얼마나 소요되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겨울 바다를 보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기보단

경부고속도로라는 글자만을 위해

요리조리 미로 찾기에 뛰어들었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 것이다.


약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와!" 감탄하며

무사히 IC를 빠져나갔다.

아마 처음 고속도로를 지나쳤을 때도

그렇게까지 신기해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서쪽에 있고 강릉은 동쪽에 있으니

아는 도시가 나오면 무조건 우측 마지막 차선으로

빠지기로 마음먹고 서울 초입이 나오지 않기만을 빌었다.


용인을 지났을 때쯤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알음알음 듣기만 했었던 지명들을 눈에 담으며,

이미 앙상해진 우리 집 앞 나무와는 달리

사계절 내내 푸른 소나무를 마주하기도 하고

저 동네 이름은 누가 만들었을까? 싶은 지명도 발견했다.


그리고 고대하던 [영동고속도로]를 마주하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출발한 지 2시간이 넘었을 무렵이다.

하나의 이정표로만 바라봤던 초록색 표지판이

바깥 날씨와는 대조되게 유독 푸르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집에서 출발한 지 약 4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을까?

누군가 당시 내 표정을 봤다면

몇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유학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반가운 표정으로 강릉에 입성했다.


여담이지만 우리나라 고속도로가

이렇게 잘 되어있는 줄 이때 처음 깨달았다.




6년 만에 도착한 강릉에 들어서서 생각했다.

'원래 경포대에 가려던 건 아니니까 뭐.

커피 마시고 싶으니, 안목해변으로 가야지.'


나는 겨울 바다가 목적지였으니

아무렴 어떻겠냐는 마음이었다.

(이때, 강릉의 평화를 위해 잠시 내비게이션을 켜두었다.)


안목해변의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넓게 펼쳐진 겨울 바다를 구경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전보다 배로 많아진 카페 수에 놀랐고,

평일이었음에도 창가 자리가 꽉 차 있는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분명 내 취향 외관의 카페가 눈에 띈 것은 사실이나

멀리서 봐도 사람들의 바글바글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바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어느 한적한 창가가 있는

카페를 발견하곤 바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수없이 휘몰아치는 파도를 바라보며

아무 말하지 못했다.


정적을 깬 것은 커피가 완성되었다는 진동벨 소리.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가만히 창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그제야 몸에 긴장이 풀렸는지 주책맞게 눈물이 났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도 나지 않는

이 카페가 내 위로였고 내가 깨부순 문의 열쇠였다.


아마 미리 검색해 보고

내 취향의 카페를 몇 군데 점찍어 둔 뒤

좀 전의 상황을 마주하고 차선책으로 들어온 곳이었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어도

별일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 속에서 내가 보지 못하고 놓치고 있었던

소중함이 주는 애틋함.


단 하루, 그보다 짧은 반나절 사이에 느낀 감정들로도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불안에 떨며 지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여정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길을 가다 소품샵이 있어서 엽서를 골랐고,

또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서 숙소를 찾았다.


다음 날 폭설이 내릴 줄도 미처 몰랐기에

생각보다 출발이 늦어졌지만 조급하지 않았다.

중간에 잠시 휴게소에 들러 밤 사이 쌓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 첫눈이 내리면

마냥 좋아했던 것처럼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내 삶이 180도 변했을까?


아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 삶은 청춘드라마가 아니기에

당월 하이패스 요금이 늘었고 세상은 여전히 차가웠으며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었다.


다만 나는 현재의 불안함을 피하고자

후천적 J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모든 일이 잘 되리란 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망하리란 법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자발적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있다.


현실은 변하기는커녕 팍팍해져 가는데,

깨달음만 얻고 마음만 바꿔서 무얼 하겠느냐마는

내 마음에서 내 시야와 말이 흘러나오고

내가 바라보는 시선과 말들은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나는 여전히 계획을 세운다.


여전히 To do list를 적고 일을 마치고

체크 표시를 하는 것이 즐겁다.

그리고 여전히 그 모든 항목을 빈칸 없이 채우진 못한다.


가끔은 내 오랜 친구인 불안이 나를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그럴 땐 예정에 없던 방문이 썩 달갑지 않아도

늘 나를 위해 걱정했던 친구를 위해 기꺼이 베개를 내어준다.


"피곤했을 테니 오늘은 조금 쉬어도 돼.

푹 자고 일어나서 이야기하자."


다음 날 아침이면

언제나 인사도 없이 나가버리지만 서운하지 않다.

아마 앞으로도 종종 반복될 것임을 알고있기에.


그저 나는 이렇게 또다시 아침을 맞이하고

하루의 일정을 빼곡히 채워나간다.


내 여전한 계획들을 위해서.




다음화


자발적 재택근무의 시작 EP5. 전문직이라는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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