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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빵의 추억 09화

크루아상: 세련된 일상의 맛

by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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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우면 플랭크를 해라.

배 근육에 힘을 단단히 주고 플랭크를 하는 1분 1초는 억겁 같은데,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어쩜 그렇게 쏜살같을까?


자칭/타칭 빵순이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빵은 크루아상이다. 영 기운 없는 아침이면 근처 카페에서 크루아상과 따뜻한 카페라테를 테이크아웃해 집으로 돌아온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여유롭게 베어 문 크루아상과 묵직한 라테에 질렸던 일상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

회사에 3년 근속하여 받은 2주간의 달콤한 리프레시 휴가, 남편과 프랑스로 떠났다. 대단한 여행 계획은 없었지만 꼭 하겠다 선언한 것은 “1일 1 크루아상”이었다. 크루아상 맛집을 찾겠다고 여행 전 꼼꼼히 유튜브를 뒤지고, 맛집 정보를 수집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맛집은 현지인에게 묻는 것이 가장 좋다. 현지 투어에 참여하며 만난 가이드 분들께 물었다.


“크루아상 맛집이 어디예요?”


제발… 당신만 아는 그 고급 정보를 저에게 풀어주세요. 아무에게도 소문내지 않고 맛있게 먹고 돌아갈게요… 영화 <슈렉>의 고양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기대감에 잔뜩 부푼다. 그 누구보다 크루아상에 진심인 중생의 간절한 마음은 관심 없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시시했다.


“다 맛있어요~”


아니다.. 내가 원한 대답은 이게 아니다.


“그래도 ‘정말 여기는 꼭 먹어야 된다’가 있지 않으세요?”
“진짜로 다 맛있어요!”


모든 것을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방패의 싸움이 이런 걸까? 모든 것을 뚫을 수 있는 창은 일단 후퇴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새로운 적수가 나타날 때마다 창을 들이댄다.


“크루아상 맛집이 어디예요?”
“다 맛있어요!”
“아니, 제가 물어보는 분마다 다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어김없이 돌아온 똑같은 대답에 발끈했더니, 가이드님이 설명을 덧붙인다.


“프랑스에서는 크루아상 맛없으면 가게가 망해요. 그래서 크루아상 맛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어요.”


생생한 우문현답의 현장이다. 그제야 왜 다들 어딜 가도 맛있다고 말한 건지 이해가 되었다.


프랑스 여행 중 크루아상을 처음 먹었던 것은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한 날 아침 9시였다. 루브르 뮤지엄 전시를 보기 전, 아침 식사를 위해 근처에 힙하다는 카페를 찾았다. 이른 시각이었는데도 사이좋은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에스프레소에 티스푼으로 설탕을 넣고 휘휘 젓는 모습에 ‘내가 프랑스에 오긴 했구나’ 실감이 났다.


노출형 콘크리트 벽에는 밀짚모자가 걸려 있고, 천장에는 라탄으로 짜인 큼직한 조명이 매달려 있다. 분위기에 영 어울리지 않는 원색의 폼폼이 앵무새 모형을 둘러싸고 있다. 당시엔 무슨 필터가 씌었는지 마냥 이국적이고 예뻐 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근본 없는 인테리어다.


고작 빵에 커피만 시켰는데도 음식이 나오기까지 한참 걸렸다. 유튜브에서 배운 프랑스 예절대로 절대 재촉하지 않고 초조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눈은 힐끗, 입으로는 대화에 집중하는 척하는 사이 크루아상과 플랫화이트가 나왔다. 한국의 크루아상처럼 크거나 예쁘진 않고, 오히려 투박했다. 옆구리는 뜯어져 있었다. 손에 쥐어보니 겉의 페이스트리가 파사삭 부서지지 않고 단단하게 모양이 잡혀있어 강인함이 느껴지는 크루아상이었다. 한 입 베어 무니 뽀얀 속살이 쫀득하게 씹혔다. 버터향이 밀려왔다. 내가 아는 그 맛인데 확실히 언아더 레벨이었다.




"1일 1 크루아상"은 90% 정도 성공했다. 아침 7시에 북부 도시 에트르타로 향하는 날에는 투어 차량이 잠시 쉬기 위해 들렀던 고속도로 휴게소의 카페 체인점에서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을 샀다. 흐릿한 날씨에 휩싸여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출발 시각을 놓칠 세라 후다닥 먹었다. 파리에서 니스로 이동하는 일요일에는 예정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마을을 돌며 아침에 여는 카페를 꾸역꾸역 찾아내서 먹었고, 두 시간 이상 테제베를 타고 아비뇽에서 파리로 돌아오는 지루한 여정을 앞두었을 때에는 비를 맞으면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크루아상을 3+1로 파는 회전율 좋은 카페에서 크루아상 두 개를 테이크아웃했다. (3+1인데 왜 2개를 샀냐며 난 남편을 한참을 나무랐고, 몇 년이 흘렀는 데도 가끔 나에게 혼나고 있다.)




남편과 나는 한국에 돌아온 후에 프랑스의 크루아상을 잊을 수 없어 크루아상으로 유명하다는 곳은 차로 이동하면서까지 찾아갔는데, 아무리 비싸고 큼직한 크루아상도 아비뇽에서 먹은 엄지 손가락 만한 3+1 크루아상을 이길 수 없었다.


집에서 몇 발자국만 나가도 맛있는 크루아상을 먹을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든든할까. 나는 일상에 믿을 구석이 있는 삶이 부러워졌다. 언제 가도 같은 맛으로 기다리고 있을 가게. 굳이 깊은 속마음을 내어 주지 않아도 느슨하고 가볍게 안부를 확인할 이웃 가게가 있다는 것. 누군가가 강렬하게 부러워하는 ‘세련됨’이 그저 평범한 일상인 아름다움을 상상한다.


모두가 숨 죽인 채 거북이 목이 되어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회색 지하철, 맑은 국물에 얇은 고기 고명이 올라간 국밥과 깍두기, 세상을 뒤덮은 까만 셀로판지를 보란 듯 뚫어 내는 요란한 네온사인은 전혀 새롭지 않고, 어디서 뺨이라도 맞은 날이면 환멸 나는 풍경이다.


관광지에 있는 사무실에서 일하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 굳이 관광객임을 숨기지 않는 초롱초롱한 눈빛들을 본다. 뾰족한 마천루를 배경으로 사진을 담는 모습, 한국의 맛을 느끼려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내 삶도 누군가 꿈꾸는 영화 속 삶이지 않을까? (물론 영화로 찍는다면 분명 하품날 정도로 지루하고 전개가 느린 독립 영화일 것이다.)


7일 중 두 번의 주말, 1년에 20일의 연차를 위해, 70%를 희생하는 삶에 지치면 최면을 걸어본다. 나는 지금 이 알 수 없는 나라에서 장기 체류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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