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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빵의 추억 11화

카스텔라: 늘 그곳에서 기다리는 맛

by 이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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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순이라고 해서 모든 빵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카스텔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은은하게 달고 부드럽게 사라지는 국민빵 카스텔라는 어린 나에게 노잼이었기에 카스텔라의 추억이 없다.


큰, 대부분 소소한 빵의 추억을 간직한 나는 이제 직장인이자, 주부이자, 엄마가 되었다. 몇십 년 동안 추억을 쌓아왔듯, 아이에게 풍부한 추억을 쌓아주는 과업이 생겨 주말이면 지도 앱 위에서 손가락이 바삐 움직인다.

따뜻한 열기가 한참 동면 중인 겨울의 중간, 우리 가족은 양평으로 향했다. 목적지인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에 빵순이 레이더만 감지할 수 있는 작은 글자가 보였다.


100% 유기농 밀, 국내산 쌀, 방부제 등 일체의 화학첨가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곧 주차장이 나와 차를 댔지만,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기에 남편과 나는 차 안에서 아이가 깨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크게 떠들 수 없는 고요함 속에서 잊히지 않던 빵집의 글귀. 나는 아이가 자는 동안 빵집에 잠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뱀처럼 차에서 미끄럽게 빠져나왔다.


하지만 빵집은 이제 막 오픈한지라 진열대가 대부분 비어 있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래도 뭐라도 하나 사고 싶어 조금 더 마음을 열고 그나마 있는 빵들을 꼼꼼히 다시 봤다. 이제 막 빵을 먹기 시작한 아이도 먹을 수 있는 카스텔라가 눈에 띄었다. 대만에서 물 건너왔다던 대왕 카스텔라 보다 더 큰 카스텔라는 넓적한 면적만큼 김을 풀풀 방출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 카스텔라를 담았다. 다정한 파티셰는 빵이 갓 나왔다며 비닐을 묶지 않은 채로 건네주셨다. 겨울 공기에 차가워진 손을 빵의 열기로 덮이며 남편과 아이가 있는 차로 돌아와 카스텔라를 크게 찢어 남편과 나눠 먹었다.


이게 카스텔라구나.


본능적으로 우유를 찾았지만 있을 턱이 없었다. 이 맛있는 걸 그동안 왜 안 먹었을까. 아이 덕분에 죽기 전에(?) 카스텔라의 진가를 알게 되어 벅찼다.




*

인생이 지루해진 서른 후반, 한 인간의 0세부터 삶의 궤적을 함께 하는 일은 인생을 또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과 같다.


현실판 회귀물이자 지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

나도 모빌을 봤겠지. 나도 맛없으는 음식을 뱉었을까? 나도 한 손에는 엄마 손을, 한 손에는 아빠 손을 잡고 걸었을까? 그때 내 표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0세부터의 삶을 다시 살아볼 수 있는 기회.

조잡한 전자음의 동요에 춤 추기. 관심 없던 공룡의 이름 외우기. 천왕성의 자전축이 91도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기. 큼직한 플라스틱 공이 가득한 볼풀에서 헤엄치기.


나는 아이의 삶에 동행하며 짙은 먹에 덮인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려 애써본다. 좋았던 것은 다시 하고, 못했던 것은 함께 도전해 본다. 카스텔라를 먹어본 것처럼.


카스텔라의 맛은 그대로 그곳에 있었고, 어린 시절의 나도 그곳에 있었다. 돌아올 나를 기다리며.

빵추_카스텔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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