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 그리고 다시 태어난 조각들
따뜻한 방 안에 앉아 미싱을 돌리는 엄마의 모습은 오래전 기억과 맞닿아 있었다. 어린시절 내가 살던 집에는 커다란 공업용 미싱이 있었고 엄마는 거기서 온갖 소일거리를 했다. 가득 쌓인 모자들 사이에서 실밥을 따고 청바지 고리를 따던 엄마와 언니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엄마는 80이 넘은 지금도, 소소한 수선은 직접 하신다.
잘했다 나녀석전을 끝내고 세상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 같았던 2023년에서 24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엄마가 집에 왔다. 눈 쌓인 창밖을 바라보던 엄마는 다리가 아파 집밖에 나갈 수 없었고 심심해 하던 엄마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가 이런 제안을 했다.
"책갈피 같은 거 한 번 만들어보는 건 어때?" 좋은 아이디어였다. 친구는 의류를 제조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동대문 원단시장에서 받아온 샘플 천들이 잔뜩 있었고 작은 조각으로 할 수 있는 책갈피 모양을 찾아 엄마에게 의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이 드러났다. 엄마의 눈은 예전 같지 않았다. 실을 꿰는 일부터 복잡한 바느질까지, 하나하나가 벅찼다. 원단 역시 샘플칩이기에 많이 만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바꿨다. 집에 굴러다니던 오래된 커튼을 꺼내어, 간단한 머리끈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모양은 단순했지만, 손에 익은 솜씨로 뚝딱뚝딱 하나 둘 만들어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할뭉스의 머리꽃'이었다.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는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엄마의 무료한 시간을 엄마의 재능으로 해결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생산적인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 둘 머리꽃이 만들어 질 때마다 이걸 어떻게 소비해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엄마는 쉼없이 미싱을 했다. 아침에 출근 하고 나면 TV를 틀어놓고 하루종일 미싱을 한 것 같다. 집에 쌓이는 머리꽃이 배수로 늘어나는것을 보며 나의 고민도 점점 늘어갔다.
그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그리고 자주 왔다. 자연스럽게 집에 있게 되는 시간이 길어졌고 엄마와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그러던 중 엄마가 샤워를 하고 나와서 몸이 자꾸만 따갑다고 했다. 샤워하고 하얀 통에 있는걸 발랐는데 몸이 따갑다고 했다. 화장실에 가서 보니 그 통에는 “body wash”라는 작은 영단어가 쓰여있었다. 80이 넘은 노모는 그 단어가 뭔지 알았을리가 없다. 그냥 짜봤더니 로션 같은 제형이 나왔고 당연히 로션인가보다 하고 온몸에 바른 것이다. 엄마에게 설명을 하니 엄마는 깔깔거리며 웃었고 나도 엄마를 놀리며 깔깔대고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웃음뒤가 너무도 씁쓸했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제품들은 대부분 영어로 표기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고 글자도 너무 작은경 우가 많다. 이게 뭔지 아직 젊은 나이인 나 조차도 한참을 들여다 봐야 뭔지 이해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고 팔리는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기업들에게 디자인적 요소를 무시하고 모두가 잘 보이는 제품을 만드세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는 엄마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엄마집에 있는 엄마는 모든 것이 엄마에게 맞춰져 있으므로 관찰할 이유가 없었지만 우리집에 온 엄마는 모든것 낯설터였다. 전자레인지의 버튼이 터치인것도, 인덕션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도, 문을 열고 닫는 모든 과정도 디지털이라는 틀에 갇혀 불편한 것들 천지였다. TV를 켜고 끄는 단순한 일 조차 잘 보이지도 않는 보이지 않는 아이콘 속에 갇혀 있었다.
엄마를 위해 잘 보이는 스티커가 필요했다. 사실 그 전에도 수없이 엄마의 핸드크림과 로션에 “손크림” “얼굴크림”같은 글씨들을 써서 지워지지 않도록 그 위에 투명테이프를 바르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우리 엄마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였을 테니 스티커를 대량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엄마가 만드는 머리꽃을 판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업사이클링을 기반으로 제품을 만들어내고, 그 수익금으로 어른들을 위한 '생활 스티커'를 만들기로 했다. 샴푸, 린스, 얼굴로션, 몸로션 같은 단어를 아주 크고 두꺼운 글씨로 만들고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물에 젖어도 떨어지지 않도록 구상했다. 그리고 그 스티커에는 머리끈을 구매해준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넣었다.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위해 함께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원단은 새로 사지 않았다. 엄마가 평생 다녔던 '패티 의상실'에서 쓰고남은 남은 자투리 천을 보내주었다. 업사이클링이라는 키워드에 걸맞게, 버려질 뻔한 천 조각들을 다시 살렸다. 감각이 무뎌져 서투른 바느질 이었지만, 돋보기를 껴도 잘 보이지 않는 바늘구멍을 찾아 힘겹게 실을 꿰어야 했지만, 엄마는 늘 웃으면서 말했다.
"누구 머리에서 꽃이 필라나~"
엄마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판매를 어떻게 할 지 고민하느라 시간이 꽤 지나버렸다. 그렇게 봄이 왔고 힐러스 1주년을 기념하는 타이밍에 맞춰, 머리꽃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판매했다.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응원해주었다. 구매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했고, 그 이름을 담은 스티커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스티커를 어떻게 배포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냥 집집마다 가서 나눠드리면 될까? 아니면 신청을 받아야 할까? 도무지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현남면 면사무소를 찾았다. 당시 면장님은 우리의 취지를 진심으로 이해해주셨다. "이런 건 진짜 필요하네요.나도 매번 매직으로 써드리는데" 그 말 한마디에 그동안의 수고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다만, 직접 배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개인정보 문제로 인해 가구별로 스티커를 전달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이장협의체를 통해, 각 마을 이장님들께 스티커를 전달했다. 사실 지역에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막상 어디에 누가 사는지 언제 집에 사람이 있는지 알 길도 없다. 결국 이런 일들도 지역의 기관에 문의하고 절차를 거쳐 도움을 얻어야만 가능한 일들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피드백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글을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도 이 스티커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노년층을 위한 프로젝트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노유자를 위한 생활 편의 아이템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돌아보면, 세상은 점점 더 세련되어가지만, 그 세련됨이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다. 작은 배려, 작은 불편함을 해결하는 일이 때로는 거창한 혁신보다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걸, '할뭉스의 머리꽃'을 통해 배웠다.
엄마와 내가 만든 머리꽃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들이었다. 세상에 똑같은 삶이 없듯이, 똑같은 머리꽃도 없었다. 조금 삐뚤어지고, 실밥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이 프로젝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매끈하고 번지르르한 것이 아니라, 삶의 흔적이 담긴 것들이 진짜 의미 있는 기록이라는 걸 알게 된 프로젝트였다.
할뭉스의 머리꽃은 물건을 만들고 가치를 만들어내는데 그치지 않고 엄마와 나, 그리고 이 마을의 누군가를 위해 삶을 조금 더 다정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가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고맙게도 당시 면장님이 널리널리 알려야 한다며 군청의 홍보과에 연락을 해주셨다. 어쩌다보니 인터뷰도 하게되고 어쩌다 보니 기사도 우수수 나오게되어 처음 의도와 상관없이 반짝이게 된 프로젝트가 되었다.
할뭉스라는 이름은 할머니와 힐러스의 합성어로 만들어졌다. 할뭉스라는 이름을 만들고 엄마가 직접 쓴 할뭉스라는 글씨로 로고를 만들었다. 그리고 머리에 꽃이 핀다는 엄마의 표현에서 착안해 “꽃”에 핀 엄마의 얼굴을 로고에 추가했다. 그 꽃과 꽃받침 역시 엄마의 손길에서 태어났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엄마의 딸이었다.
더하기2. 미디어로 비춰진 할뭉스
https://brunch.co.kr/@kimswim/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