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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한강공원② 모래섬에 쏟아진 50만 발걸음

어떻게 여의도는 '너나 가져라'던 모래섬에서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 했는가

by Nak
① 민간에 널리 퍼진 ‘너나 가져라’ 속설 — 여의도의 첫 번째 얼굴

한자 그대로 여의도라는 이름에는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내려온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여의도라는 세 글자, 그 속에 담긴 대중의 인식은 사실 오랫동안 쓸모없음에 가까웠다. 한자 그대로 '너 여(汝)', '의로울 의(矣)', '섬 도(島)'. 해석하면 '네 섬' 정도로 풀이되는데, 여기서 '네 맘대로 가져라', '너나 써라' 와같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파생되었다. ‘汝矣島’라는 한자에서 첫 글자인 汝(너 여) 로 인해서, 홍수가 나면 물에 잠겨 아무도 쓸모 있게 쓰지 못하니 '너나 가져라'라는 냉소 섞인 표현에서 비롯되었다는 속설이다.


실제로 여의도는 조선 시대부터 한강의 흐름에 따라 형태가 시시각각 달라지는 거대한 모래섬이었다. 큰 비만 와도 물에 잠기고, 며칠만 해가 나도 여의도의 경계가 다시 드러나는 식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지역을 "사람이 살기 어려운 땅"이라고 여겼고, 거기서 생겨난 농담 섞인 속설이 바로 '너나 가져라'설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 속설은 여의도가 오랫동안 '한강의 변두리'로 취급되었다는 인식을 날카롭게 들어낸다. 그리고 한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여의도 = '이용 가치가 낮은 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 자료를 들여다보면, 여의도의 이름은 이 단순한 속설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다. 조선 후기 문헌에는 여의도를 잉화도(仍火島), 양화도(楊花島), 혹은 나의주(羅衣洲) 라고 기록한 경우가 많다. 특히 나의주(羅衣洲)라는 표기는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하는데, 이는 한자로 풀기보다는 우리말을 음차하여 기록한 형태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 본래의 고유어 발음을 따라가기 위해 음이 비슷한 한자를 빌려 쓰는 음차 현상이 발생하는데, '나의주'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여기서 ‘나의(羅衣)’는 ‘너의(너벌)’을 적은 방식이라는 해석이 있다. 여기서 너벌은 넓다의 옛말이나 널찍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여의도는 '쓸모없으니 너나 가져라'는 포기의 땅이 아니라, 한강에 떠 있는 가장 넓고 널찍한 모래섬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너벌섬이라는 고유어가 시간이 흐르며 한자인 여의도로 정착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너벌섬(넓은 벌판 같은 섬) → 음차 → 나의주(羅衣洲) → 이후 음훈차를 거쳐 여의도(汝矣島)로 굳어졌다는 흐름이다. 이런 과정을 보면 여의도라는 지명은 "물에 잠기니 너나 가져라"라는 속설보다 '넓고 평평한 모래섬'이라는 땅의 지형적 특징을 기록한 이름에 가깝다.


지명 분석만큼 중요한 사실은 여의도가 원래 '섬'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고층빌딩과 국회의사당이 자리 잡은 이 땅은 원래 강의 흐름이 만들어낸 자연지형, 즉 하중도(河中島)였다. 한강은 물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지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여의도와 같은 거대한 모래섬이 형성되었다.


여의도는 지형이 편평하고, 홍수 때마다 침수되며, 사주가 넓게 펼쳐지고 식생이 자주 뒤바뀌는 전형적인 자연 하중도였다.


"넓다 → 너벌섬 → 나의주 → 여의도"라는 흐름이 지명 변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조선 왕조는 이 섬을 '버려두지'않고 매우 가치 있는 국유지로 활용했다. 이 가치는 바로 넓은 평지에서 기인한다. 고종 시기 편찬된 동국여지비고를 보면, 여의도는 과거 왕실 가축을 기르는 국립 목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록은 사축서(司畜署)의 관리들이 이곳에서 양 50마리, 염소 60마리를 방목했다고 전한다. 수십만 평에 이르는 넓은 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의도는 태어날 때부터 대규모 인원(혹은 가축)을 수용하는 기능성 공간이었던 셈이다. 1968년 한강 개발 전까지 여의도의 통행량은 사람이 아닌 가축의 걸음 수에 의해 측정되었을 것이다.


가축 110마리의 발자국이 오늘날 어떤 데이터로 대체되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2025년 여의도역·여의나루역 오전 7~9시 하차 인원(월간 누적)을 기반으로 한 흐름을 살펴보자.


1) 여의나루역

2025년 오전 7~8시 월평균 하차 인원 : 44,940명

2025년 오전 8~9시 월평균 하차 인원 : 74,799명

시트 6 (2).png 2025년 월/분기별 여의나루역 하차인원(오전7~9시)

위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 여의나루역은 출근 시간대(7~9시)에만 월 약 12만 명 하차한다. 조선시대 강물에 잠겨 사람도 가축도 살기 어렵던 모래섬의 가장자리는 이제 매월 12만 명이 출근 시간대에만 발을 내딛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2) 여의도역

2025년 오전 7~8시 월평균 하차 인원 : 154,870명

2025년 오전 8~9시 월평균 하차 인원 : 195,180명

시트 6 (3).png 2025년 월/분기별 여의도역 하차인원(오전7~9시)

여의도역은 금융 중심가면서 많은 회사들이 밀집한 핵심 오피스 지역이기 때문에 약 35만명이 쏟아져 들어오는 서울의 대표적인 밀도 높은 공간이 되었다.


여의나루와 여의도를 합치면 매월 5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오직 밥벌이를 위해 이 아침의 전장에 뛰어든다. 가축이 풀을 뜯던 한가로운 목장은 이제 서울의 금융, 정치, 문화 공간 복합시설의 요충지가 되어 바쁜 현대 서울이라는 도시의 얼굴이 된 셈이다.


② 근대사의 시작: 비행장과 '하늘 길'의 개척


여의도의 운명이 가장 극적으로 변모한 것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였다. '가장 넓은 평지'라는 태생적 조건은 근대 문물이 들어오자 가장 효율적인 기능성 공간으로 재해석되었다. 1916년, 일제는 이곳에 여의도 비행장을 건설했다. 이는 한반도 최초의 비행장이자, 6.25 전쟁 이후까지도 서울의 주요 국제공항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 여의도는 '가축의 섬'에서 '하늘 길의 관문'으로 완전히 탈바꿈하였다. 비행기는 이 땅에 국가적인 중요성을 부여했고, 여의도는 서울과 외부 세계를 잇는 최전선이 되었다. 이처럼 근대 초부터 여의도는 단순한 섬이 아닌, 국가 운영의 핵심 인프라이자 사람과 물자가 폭발적으로 이동하는 기능 공간으로 그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여의도의 오늘날 모습을 결정한 것은 1960년대 말 박정희 정부의 '한강 종합 개발'사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밤섬 폭파(1968), 여의도 제방·매립 공사, 도로 건설, 그리고 국회의사당·방송사·종합 청사 이전 같은 국가 주도 개발이 여의도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었다.


당시 정부는 한강의 물길을 곧게 펴고 홍수를 줄이기 위해, 그리고 여의도를 새로운 행정·금융 중심지로 조성하기 위해 밤섬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대규모 폭파 공사를 감행했다. 이 사건은 단지 작은 섬 하나가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한강 하류 전체의 지형을 뒤바꿔 놓은 도시사적 분기점이었다. 밤섬의 부재로 한강의 흐름이 크게 변했고, 그 변화는 여의도의 개발 가능성을 크게 넓혔다.


밤섬 폭파 후 이어진 것은 여의도 제방 축조와 대규모 매립 작업이었다. 수십 년 동안 매해 침수되던 하중도가 처음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제방이 완성되고 토사가 채워지자 여의도는 더 이상 강물 위의 떠다니는 모래섬이 아니라 '육지와 연결된 안정된 땅'으로 탈바꿈했다.


1968년 한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둑(제방)을 쌓는 공사가 완료되면서, 여의도는 비로소 홍수 걱정 없는 안정적인 대지로 변모되었다. 정부는 이곳을 서울의 맨해튼을 목표로 국회의사당, 금융기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정치·경제의 심장부로 계획한다. 이 시점부터 여의도는 섬이 아니라 한강의 도시적 확장지, 즉 서울의 미래를 담아내는 실험 공간이 된다.


둑 공사 이후 여의도 면적의 상당 부분은 여의도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아스팔트가 깔린 거대한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70~80년대 국군의 날 퍼레이드, 대규모 국정 홍보 집회 등이 열렸다. 여의도 광장은 국가의 역량을 과시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상징적인 무대였다. 심지어 이곳은 1980년대까지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③ 일상의 공간으로의 전환


여의도 한강 공원 부지는 1980~1990년대까지도 기본적으로 '둔치', 즉 홍수터였다. 비가 오면 물에 잠기고, 건기가 되면 넓게 펼쳐지는 허허벌판, 잠수교가 매년 몇 차례 잠기는 것처럼, 이 둔치 역시 강의 리듬에 따라 늘 변화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는 한강의 둔치를 생활공간으로 되돌리는 큰 방향을 잡는다. 한강 르네상스 이전의 초기 시도였다. 여의도 둔치는 이 시점부터 산책로, 자전거길, 잔디밭, 수상시설을 갖춘 새로운 형태의 시민 공간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변화는 2009년 '한강 르네상스'프로젝트와 함께 찾아왔다. 서울시는 강변을 가로막고 있던 회색빛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완만한 경사면과 자연석, 그리고 식물을 채워넣었다. 접근하기 힘들었던 가파른 제방은 물빛광장과 피아노 물길 같은 관광 공간으로 탈바꿈했고, 비행장이 있던 자리는 이제 연인과 가족들이 돗자리를 펴는 거대한 녹색 캔버스가 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결과, 여의도는 처음에는 사람이 살기 힘든 변두리 모래섬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러너·자전거 이용자·피크닉 인구·출근 인파가 함께 공존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복합 일상 공간이 되었다.


Data Sources

Pattern Studio (data processing & analysis) — https://patternst.com/en
Seoul Open Data Plaza — https://data.seoul.go.kr/

English Ver - https://medium.com/@chunja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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