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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30대 프리터족으로 산다는 것

퇴사 후 명품 포장 아르바이트

by 선인장



프리터족으로 살며 여행은 아예 접었다. 단숨에 큰 액수가 숭덩숭덩 나가는 여행은 작은 돈을 야금야금 써야 되는 프리터족의 삶과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포기했을 뿐인데, 비슷하게 여행을 좋아했던 회사 선배가 “그 정도면 너는 사실 여행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라며 부정했을 땐 괜히 억울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여행도 미뤄둔 채,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한 때는 나도 갓생을 꿈꿨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성실하고 똑 부러지는 줄 알았던 10-20대 시절, 30대가 되면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일로 꽉꽉 채운 슈퍼 커리어우먼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단단한 꿈으로 반짝이던 내가 불안정 노동층인 ‘프리터족’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간절했던 회사에 입사하고 난 뒤 나와는 맞지 않다는 걸 느끼는 데에는 5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회사를 다니며 서서히 망가져갔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포기했다. 돈의 여유보다 시간의 여유를 선택했다. 없는 건 돈뿐이 아니었지만, 시간 부자가 된 나는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회사를 그만둔 뒤에야 비로소 편히 내가 열망했던 분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경우,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었던 셈이다. 친구들의 번듯한 삶과 동떨어져 종종 작아지기도 했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역시, 나와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퇴사 후 나는 곳곳에서 사소한 성취들을 긁어모아 망가진 나를 일으켜 세웠다. 희망을 갖는 게 두려웠던 내가 이제야 꿈을 단단히 재건하고 있다.


하지만 평생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벌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갈수록 공부하기엔 늦은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안다. 아르바이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이에 제한을 두는 아르바이트가 이렇게 많다는 걸 프리터족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물론, 적어도 사장보다는 나이가 어린 아르바이트생이 여러모로 편할 것이다. 비교적 편한 환경에서 고정적으로 오래 일할 수 있는 소위 ‘꿀’ 아르바이트는 25세, 많아도 30세의 나이 제한을 두는 곳이 많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아보니, ‘당근’에 뜨는 건 단발성인 ‘마당 화초 뽑기 알바’, ‘흰 머리 뽑기 알바’, ‘앵무새 밥 주는 알바’ 등이었다. 지금은 운 좋게 나름 무난한 아르바이트를 구한 상태지만,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이 다음은 정말 프레쉬매니저(요구르트 아줌마)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강박과 완벽주의에 시달리던 나는 프리터족이 되면서 매사에 힘을 빼는 연습을 해봤다. 마음 편히, ‘될 대로 돼라’ 마인드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적당한 강박은 건강한 규율인 걸 안다. 그리고 열심히 살면 그만큼 잘 풀린다는 보장이 없는데, 게으르면 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도.


그러니 몸도 마음도 편한 현재에 마냥 드러눕고 싶다가도, 미래의 몸과 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만족과 내일의 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 프리터족에게 필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처음으로 명품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어마무시한 금액대에 다시 한번 기함했지만, 예상외로 대폭 할인한 미끼 상품들이 널려 있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어마무시한 금액이다. 그런데 70%, 80% 할인이 붙자 갑자기 심장이 막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엄청난 행운이 내 눈앞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손가락이 자연스레 '구매' 버튼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충동구매를 질러버렸고 나는 하루, 아니 몇 시간도 안 지나 후회했다. 하여 구매취소를 하려고도 했다. 그런데 또, 기왕 이렇게 된 거 [명품]은 얼마나 다른지 막상 받아보고 싶어졌다. 매번 포장하며 보고 만지던 명품이지만 구매하는 입장에서 받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상품이 도착하자... 음, 역시 질이 좋고 예쁘긴 하다. 이 금액을 소비할 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곱게 포장해 상품을 반송했다.


그런데 그 후, 자꾸만 그 명품 판매 사이트에 들어가 보게 된다. 그리고 완성도 있는 디자인, 무엇보다 할인폭에 다시 또 심장이 두근거린다. 어쩌지. 한번 더 속아줘야 하나. 어쩌면 나... 이러다 여행 대신 명품을 지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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