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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Apr 23. 2016

누구나의 마음속에, 로망

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7)

1.


누구나의 마음속에 로망이 있다. 한편의 영화에, 한 장의 사진에, 누군가 들려준 한 마디 말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언젠가 그곳에 가볼 수 있는 날이 있기를 꿈꿔본다. 아주 먼 곳일 수도 있고, 가까운 곳일 수도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오래 바라 온 로망을 실현하는 순간, 마침내 그 장소에 발을 딛고 서보는 순간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더없는 희열의 순간일 것이다.


내게 로망의 장소은 미스터리한 고대 유적지들, 황홀경을 선사하는 바닷속 세상, 성서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 그리고 아름다운 문학을 꽃피워낸 무대들이었다. 여행을 오지게 다닌 덕분에 이 중 대부분을 이뤘고, 일부는 남아 있다. 여행이 흔치 않은 시절에 세계일주를 했고, 사막도 건너봤고, 바다 세상도 보았고, 하늘 위도 날아봤고, 길바닥 하드코어 노숙부터 최고급 여행까지, 굉장한 풍경들도 마음에 넘치도록 보았다. 그리고 이젠 어지간해서는 아! 그곳...! 하는 곳이 많지 않은 내게, 행복한 몇 개의 꿈이 남아있다.


빠이는 그중 한 곳이었다.

여행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은둔의 마을.

 


빠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건 한 15년쯤 인 거 같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면 티가 난다.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발그레 상기된 표정, 신이 나서 손동작도 커지고, 열렬한 마음만큼 상대와 마주 앉은 몸도 바짝 앞으로 기운다. 빠이 이야기만 했다 하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눈이 빛나고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듣는 빠이는, 세상으로부터 감추어진 유토피아 같았다. '히피들의 천국', '배낭여행자들의 메카'라는 말 외에도 빠이를 수식하는 말들은 몹시 매력적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


IndePendent의 P  
PeAce의 A
LIberty의 I

빠이pai를 이루는 것들 -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인류의 '평화' 그리고 마음의 '자유'. 아 정말 근사하지 뭔가. 예술이 담겨있고, 히피가 담겨 있고, 저항이 담겨 있는 마을 이름이라니. 나는 가보지도 않은 빠이를 마음으로부터 사모하기 시작했다.



2.  


시간이 흐르며 빠이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변하기 전에, 빠이가 빠이다움을 잃기 전에 어서 가야 하는데 싶어 애가 탔다. 어떤 장소가 고유한 매력을 지켜내며 여행자를 품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얼마나 순식간에 망가져버리는지 많이 보아왔으니까.


하지만 쉽게 가지지 않았다. 로망은 단순히 '행한다'가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이루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니까. 얼결에, 채근하듯, 쓱 다녀오고 싶지는 않았다. 오래 간직해온 로망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걸 보느니, 마음속에 영영 품고 사는 편을 택할 것이다!


대부분의 로망이 가진 공통점은 실현할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어느 날 불현듯 그 순간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한다. 내게는 그 순간이 십 수년이 흘러 찾아왔다. 허니문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허니문을 어디로 갈까 고민할 때, 단연 호주가 떠올랐다. 내 여행의 시작이자 첫사랑 같은 곳.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곳에 다시 오고 싶다..."

호주의 동부 해안, 빛나게 아름다웠던 미션 비치를 홀로 걷던 그날 밤의 소원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호주로 떠나려 했는데, 마음에 계속 빠이가 떠올랐다. 한 달 여로 예정했던 허니문은 호주 15일, 아시아 15일로 쪼개졌고, 느릿느릿 여행에 최적화된 나는 고작 한 달을 두 대륙으로 나누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려 결국 고민 끝에 아시아 한 달을 택하고야 말았다.


당연히 호주였어야 할 허니문이 인도차이나 여행으로 급 선회한 것도 빠이 때문이고, 방콕-치앙마이-빠이까지의 일정만 잡아두고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무계획인 것도 빠이 때문이었다. 빠이 이후로의 모든 것을- 여행할 도시도, 머물 숙소도, 심지어 돌아오는 귀국 날짜까지도 미정으로 두었다. 빠이에서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고, 이제 됐다 싶을 때 떠나고 싶었다. 그게, 빠이의 로망을 이루는 나의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다, 빠이 때문이었다.

 


3.    


치앙마이도 트레킹의 도시로 유명할 만큼 온통 산으로 뒤덮인 산악지방인데, 빠이는 과연 첩첩산중. 치앙마이를 출발하고도 무려 네 시간이나, 중간에 헉 소리가 몇 번 날 정도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길이 잘 닦인 지금도 이 정도인데, 예전에는 정말로 은둔의 마을이었겠구나 싶다. 길이 깔리기 이전에는 치앙마이에서 열 시간은 족히 들어와야 했을 것이다.


빠이에 도착하고, 어딘지 모를 곳에 미니밴은 우리를 떨궈놓았다. 미리 예약해 둔 숙소 '오아시스 빠이'에 전화를 걸었다. 아주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인데, 주인이 짱 친절하다고 했다. 인터넷을 통해 예약을 했는데, 다음날 바로 이메일이 왔다. 픽업을 해줄 테니, 빠이에 도착하거든 전화를 하라며. 하루 숙박비가 만 원이 채 안 되는 곳에서 픽업까지 해준다는 게 송구스러웠지만, 도착하자마자 이곳엔 택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친절에 덥석 매달렸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눈 앞에 OO라고 쓰인 건물이 있어요!"

그리고 5분이 채 되지 않아 오토바이 한 대가 달달달, 우리 앞에 등장했다.


우리가 머물 방은 정말이지 작고 심플했다. 더블침대 하나와 작은 옷장, 선반 하나로 이루어진 방이었고, 아주 간소한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빠이와 허니문, 어쩌면 신혼여행지로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 중 하나가 아닐까. 즐길 거리는 아무것도 없고, 저녁 7시가 되니 혼자 걷기엔 겁날 만큼 캄캄한 시골 마을. 그리고 이토록 소탈한 숙소.   


밤에 추워서 태봉을 꼭 껴안았다.

그렇게 누워 잠을 청하는데,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결혼식 날, 하객들 앞에서 혼인서약서를 낭독하며 우리가 읊었던 시다.  


나뭇가지 아래 놓인 시집 한 권
빵 한 덩이, 포도주 한 병
그리고 당신 또한 내 곁에서 노래를 하니
오, 황야도 천국과 다름없습니다.



내가 빠이에 왔다.  

나의 로망과 낭만이 담겨 있던 그곳에, 당신과 함께.  

Honeymoon으로 이보다 더 멋진 곳이 있을까.

자그마한 침대에 꼭 붙어 안고, 이곳이 정녕 천국이 아닌가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계속)


조오기 오른편 하늘색 방이 우리가 머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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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려움의 벽이 허물어진 자리, 오늘의 시간이 스며들다.

4. 치앙마이, 네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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