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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하게 Aug 30. 2020

아빠는 옳았고, 나는 착각이었다.

사랑을 모르는 이에게서는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a와의 관계를 끝내고 난 후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이제 진짜 사랑을 해보길 바란다고. 그리고 나는 말했다. a와의 관계가 나에게 힘든 관계였음에도 그래도 진짜 사랑을 해봤다고. 그런데 아니다. 아니었다. 아빠는 옳았고 나는 착각이었다.

그 후, 내가 가장 최근에 만났던 b에게서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사랑을 느꼈던 것은 그저 특별한 사랑이 아닌 ‘진짜 사랑’이었을 것이다. b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a와의 관계를 떠올리다 ‘진짜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연유는 이러하다. 나는 a의 관계 속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는데, 이는 단순히 상대가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서였다는 것이다. 사랑을 몰랐던 사람에게서 사랑받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김치찌개를 먹어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서 나에게 김치찌개를 해주길 원하고 있는 것. 심지어 대충 흉내만 낸 김치찌개가 맛있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김치찌개를 제대로 먹어본 사람에게서 맛있는 김치찌개를 얻어먹은 것은 당연하다.


그다음 만난. 그러니까 얼마 전에 헤어져버린 b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 사람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혹은 ‘아 드디어 내가 원하던 사랑을 받는구나. 이게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람은 운명이다’라고 느꼈었는데 그것은 결코 그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가 내 운명이었어서가 아니라 b는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사람이고 그래서 ‘사랑’을 주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치찌개를 제대로 먹어보고 만들 줄 아는 사람에게서 맛있는 김치찌개를 얻어먹은 것은 당연하다.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해본 상대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을. 결코 특별해서, 운명이어서가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안도했다. 이제 진짜 사랑을 알았으니 지나간 사랑이 끝일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않아도 되었음에.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아, 정말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늦게 받아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신피질의 재앙을 아는가.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남자 주인공 세희는 여자 주인공 지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스물, 서른 그리고 마흔이라는 시간에 스스로를 가두는 종족은 인간밖에 없다고. 뇌에 있는 ‘신피질’이라는 부분에서 시간의 개념을 담당하는데 진화의 대가로 얻은 게 바로 이 신피질의 재앙이라고. 신피질이 없는 고양이는 하루하루가 늘 새롭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늘 소중하다고.
늦고 빠름을 정할 수는 없지만 그간의 나에게 있었던 관계들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음에 속이 상하면서도, 그래도 서른이 되기 전(또다시 신피질의 재앙이다) 그 짧은 순간들로 진심을 다한 사랑을 받아봤음에 감사하다. 그래서 b와의 끝나버린 관계에 괜한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너는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란 아이 같아.


너는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란 아이 같아.라는 말은 어딜 가나 나를 따라다녔다. 아마도 가족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온 것이 그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누군가와의 만남에서 사랑에 대한 만족을 얻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사랑을 많이 받는 삶을 살아와서인지 나는 사랑을 주는 방법에 익숙했지만, 나에게 ‘사랑’이라고 느껴지는 사랑이 없었음에 늘 서운해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내린 첫눈처럼 나에게 온 b와의 만남에서 처음 사랑을 받아본 것이다. 내가 주고 싶은 사랑과 같은 사랑을. 그래서 나는 문득 생각한다. 아 그 사람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왔겠구나. 참 좋은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진짜 사랑을 받는 느낌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사랑받을 날들만 가득할 것이라고. 진짜 사랑과 흉내 낸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겼음에 너무 고맙다고.


진짜 사랑을 알아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어떤 따뜻한 감성 같은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쉽지 않은가. 나는 사랑 없이 살아가는 것이 힘든 이 세상에서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진짜 사랑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내린 첫눈 같은 사랑을 고마운 마음으로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또 한 가지. 나에게 곧 첫눈 같은 사랑이 오기를 온 마음을 다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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