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제 아빠가 ‘공부는 하지도 않으면서 전기세 나가게 불까지 켜 놓고 잔’ 자신을 비난한 것이라 짐작을 했을 것이다. 아버님께서 처음에 말씀을 꺼내셨을 때, 나도 아이처럼 그랬으니까.
아버님께서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이가 공부도 안 하면서 대체 왜 불을 켜고 자는 건가요?”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
나 역시 아이처럼 삐딱하게 다다다다 대답했다.
“아이가 불을 안 끄는 게 아니라, 못 끄고 자는 거예요. 해야 할 것들은 많은데 끝이 안 나거든요. 눈 뜨면 학교 가고, 학교 끝나면 밥도 소화되기 전에 학원 와서 공부를 하는데도 끝이 없어요. 아버님 저는 어떻게 더 하라고 재촉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의 방어적인 답변에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게 아니에요. 공부를 더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불을 끄고 잤으면 좋겠는 거예요. 불 끄고 편하게 자면 될 것을 그렇게 불편하게 자는 게 이상해서요. 여기 와서 다섯 달,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봤잖아요. 저도 더 이상 공부하라거나 성적이 어떻다거나 하지 않아요. 지난번에 매니저님(나)이랑 이야기하고 난 이후로 잔소리 안 해요.”
앗! 뜨끔.
지난번 상담 이후 아버님께서 잔소리 안 하신다고 아이가 얘기했었다. 구체적 방법은 제시해 주지 않으면서 ‘~해라.’, ‘~하지 마라.’는 이야기만 되풀이하면 잔소리로 밖에 안 들리니 일단 여유를 갖고 아이를 그냥 지켜봐 달라는 나의 부탁에 부단히 노력해 주시는 아버님이셨다. 그걸 느끼고 감사해했으면서... 중간고사 앞두고 아버님께서 조급해진 거라 미리 판단해 버렸다.
“죄송해요 아버님. 안 그래도 아버님께서 요새는 예전처럼 잔소리 안 하신다고 D가 이야기했는데.. 제가 아버님 생각을 잘못 파악했네요. 그런데 아버님, D가 불을 못 끄고 자는 건 발을 못 뻗고 자는 거예요. D가 지난 모의고사 성적표를 아무 말 없이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고 하셨죠? 아이들은 부모님께 더 높은 등급 성적표를 보여드리고 싶은 거예요. 어른들이 뭐라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성적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져요. 경쟁 상황에 내몰린 아이들이 시험 기간에 스스로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발을 못 뻗고 자는 거예요.”
“그게 속상한 거예요. 진짜 요즘 하는 거 보면 성적에 대해서 뭐라 할 마음이 없어요. 예전처럼 어떤 대학, 어떤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고 부담 줄 상황이 아닌 것도 알고요. 아이가 자신의 꿈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냥 좀 편히 잤으면 좋겠는 거예요.”
“제가 아이에게 아버님 마음 전해줄게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면서, 제한된 경험 속에서 꿈을 찾는 게 쉽지 않잖아요? 지금 D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힘들지만 이 과정 속에서 뭔가 얻을 수 있는 게 있을 거예요. 혹시 아이가 불 켜고 자더라도 뭐라고 하지는 말아주세요.”
“D야, 아빠가 공부도 안 할 거면서 불 켜놓고 잤다고 뭐라 하셨지? D야, 아빠는 네가 공부 안 한 걸 뭐라고 나무라신 게 아니래. 네가 지금 충분히 역량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아신대. 네가 맘 편히 못 자는 게 속상하고 안타깝다고 하시더라. 그런데 네가 느끼기에는 화를 내시는 것 같지? 어떻게 표현하셨을지 알 것 같아. 다른 애들 부모님들도 거의 그러시거든. 어른들도 가끔은 너희들처럼 표현이 마음이랑 반대로 될 때가 있어. 너희가 너무 귀하고 애틋한 마음에 불쑥불쑥 화가 나는 거야. 내 새끼 발도 못 뻗고 자는 게 속이 상해서 화가 나는 거야. 으이궁... 니들이 어찌 그 마음을 알겠어. 허기에 그걸 알면 니들이 부모지. 그치?”
아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제 귀를 의심한다.
“D야, 아빠가 생각이 엄청 많으시더라. D의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고 뭐라 말씀을 해 주시는 게 도움이 될지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게 도움이 될지 걱정하시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D에게 너무 하지 말라는 게 많은 건 아닌 지 걱정하시고, 주변에서 듣는 반듯하다는 칭찬의 소리가 D를 부담스럽게 하는 건 아닌 지도 걱정하시고, 마음속 이야기를 아빠에게는 잘 안 하는 것 같은데 속마음 털어놓을 누군가가 D에게 있는 지도 걱정하시고...”
의외라는 듯이 D가 말했다.
“뭔 생각이 그렇게 많대요?”
“이상하지? 그 정도 답쯤은 당연하게 아는 것처럼 너한테 행동하는 아빠가 그런 고민을 하신다는 게? 어른들도 너희들처럼 답을 모르겠는 게 더 많아. 그래도 D의 아버님은 대단하신 분이야. 매니저 만날 때마다 궁금한 걸 여쭤보시고, 부탁드리는 걸 해 주시려 노력하시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야. 어른들한테도 그건 정말 어려워.”
덤덤하게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마음 한편이 조금은 더 말랑해진 것 같다고 느끼는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나의 몇 마디가 힘겨운 마음을 사르르 녹일 수야 없겠지만, 시험에 대한 부담으로 불도 못 끄고 자는 아이의 지친 마음에 위로가 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D야, 말 나온 김에 묻고 싶네. 혹시 아빠한테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니?”
하는 나의 물음에
“작년에 트와이스 콘서트 다녀왔는데요, 고등학교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이라고 약속했거든요? 5월 달에 한 번 더 가고 싶은데...”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한지 아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이다. 나의 몇 마디 말 보다 트와이스가 아이에게는 큰 위로인가 보다.
어른들의 진지한 고민에 철딱서니 없이 느껴질 만큼 순수한 대답을 내놓은 D는 오늘도 책상에서 영어 모의고사 다섯 지문과 씨름하느라 불을 켜 놓고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밤새 켜진 불이 이 애틋한 부자의 마음과 앞날도 환히 밝혀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