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비는 내렸다. 고구마를 심고, 비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노심초사로 물을 뿌리고 난 뒤, 이틀이 지난 뒤 비가 내렸다. 양은 적었다. 새벽에 넉넉하게 내리는 듯 했지만, 동이 트기 전에 그쳐버렸다. 아침 출근 시간에는 완전히 개어, 흐린 하늘과 축축하게 젖은 세멘트 바닥이 비가 왔었음을 알려주었다. 반가움과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당분간은 물을 주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기쁨이 찾아왔다. 비를 싫어하는 라이녀석은 비가 왔던 밤새 좁다란 자기 집 안에 몸을 쪼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비가 그치자마자 젖은 마당을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깔고 앉아 시원한 초여름 아침공기를 만끽했다.
텃밭도 살아났다. 표현이 중요하다. 잘 버티는구나가 아니라, 살아났구나 라는 표현이 적확하다. 내가 주는 물에 텃밭은 근근히 버텨냈다. 시들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시들지 않고, 버티려는 생명력으로 새순과 꽃순을 내며 더디게 하나하나, 높이를 올렸다. 그러다 만난 비에, 텃밭은 활기를 되찾았다. 마치 배터리 충전을 완료한 것처럼, 바닥을 찍던 활기를 100퍼센트 채운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초록은 유독 짙어지고, 이파리는 더욱 생기가 돌며 사방으로 뻗었다. 이파리 끝으로, 곁순 끄트머리로 맺히는 둥글고 투명한 물방울은 그저 생기의 이미지적 보조일 뿐이다. 텃밭은 그 자체로 생동감있고 청초했다. 물방울같은 이미지적 표현이 굳이 필요없는, 에너지 그 자체의 공간이 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간의 내 노력에 조금은 서운해지지만,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현상이었다. 그런 서운함은 불필요하다. 텃밭이란 과거를 돌아볼 수 없는 진행형의 공간이다. 잘못되었다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철을 따라야만 하는 불문율의 공간이다. 그러니, 잘못되었어도, 무언가 서운함이 있어도, 앞으로를 생각하며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한다. 비가 온 직후인 지금은 감상만으로 충분하다. 초록이 짙어지고, 새벽 잠깐의 비에 모든 것이 눈에 띄게 변화했다. 작은 오이순 끄트머리로 노란 오이꽃이 피었고, 초록 타원형의 호박순 끄트머리로 노랗고 커다란 호박꽃이 피었다. 토마토는 하루가 다르게 키를 키워서, 당장 곁순을 잘라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물외, 참외, 수박은 줄기를 길게 뻗기 시작했다. 시들하던 고구마들은 이파리가 고개인 양 하늘을 바라보며 줄기를 바짝 세웠다. 바질과 깻잎은 이파리가 무성해지고 넓어졌다. 가지는 보랏빛 꽃을 하나 둘 피우기 시작했고, 고추는 하나하나가 먹을 수 있을 만큼 점점 커지고 있었다.
잠시의 비에 텃밭만 활기넘치지는 않았다. 마당의 모든 것들은 비를 좋아했다. 라이만 빼고 말이다. 4월에 심은 모과나무는 자리를 잡은 듯 새 순을 곳곳에서 피우고 있었다. 돌담의 포도나무는 하룻밤 빗물에 초록의 포도알을 셀 수 없을 만치 무성하게 매달기 시작했다. 사과나무는 바이러스에 고생을 하면서도 하룻밤 비에 몇 개 매달린 사과알을 굵혔다. 그리고, 작은 목화같은 티트리나무의 꽃이 더욱 만개하고 무성해졌다. 작년 해를 거르던 살구나무에는 올해 살구가 무척 많이 열렸는데, 밤새 비를 맞고나자 특유의 살구색으로 조금씩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시기에 기대가 가장 크다. 내가 손에 꼽는 과일 중 하나가 살구다. 살구가 익어가는 시절.. 그 포근한 색이 깊어지고, 과육이 씨앗에서 저절로 분리되며 녹는 그 맛을 나는 사랑한다. 약간의 신맛이 남아도 좋다. 색상만큼이나 포근한 식감과 맛은, 나의 태가 담겼던 그 공간, 내가 숨쉬기 전에 머물렀던 그 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그 맛을 나는 내 텃밭과 마당에서 마주한다. 나는 이 모든 감각을 온전히 마주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그 맛을 즐기기 이전에 동네 직박구리들과 참새들이 먼저 맛을 볼 것이다. 올해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수확할 시점을 가늠하는 중이다. 새들이 먼저 부리를 대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맛을 느낄 것이다. 유독 살구나무에 눈빛을 주는 이유다.
생기가 내가 원하는 것들에만 돌지 않는다. 자연은 공평하고, 자연의 마음과 내 마음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여름이 되니 맨 땅에서 여름 잡초들이 조용히 싹을 틔웠다. 그리고 메마른 봄가뭄에 내가 뿌리는 물을 맞으며 텃밭 작물들과 함께 버텼다. 그러고는 비를 맞더니 눈에 띌 정도로 키와 몸집을 불렸다. 바랭이들은 땅을 타고 낮게 깔리며 특유의 뿌리를 땅 속에 넓게 박아내렸다. 명아주는 고추 옆에서 하룻밤 비에 고추보다 키를 높게 키웠다. 꿀풀류 역시 굵직한 뿌리를 깊게 박고 줄기를 옆으로 길게 늘렸다. 그늘진 곳의 바랭이들은 키를 약간 높인 채 군집을 이루어 물외를 뒤덮을 참이었다. 어느 한 구석부터 초록은 점점 밀도를 높이더니, 작물과 잡초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그물망을 타지 않은 오이 주변이 그러했다.
비가 오고나니 기쁘지만, 여름걱정은 이제부터다. 여름의 걱정이란 잡초들과의 싸움이다. 여름비와 더위에 작물들도 신나게 자라지만, 잡초역시 신나게 자란다. 이 녀석들은 신기하게도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작물 옆에서 더욱 잘 자란다. 고추 옆에서는 명아주들이, 낮게 깔리는 호박 옆에서는 바랭이들이 잘 자라는 식이다. 그리고, 방치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작물을 뒤덮고, 땅을 뒤덮는다. 곧 있으면 나는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검질을 매고 있을 것이다.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이랑과 고랑을 뒤덮은 검질들을 거두어야 한다. 챙이 넓은 모자와, 땀을 닦고 노출된 뒷목을 가릴 수건을 메고, 긴팔 셔츠와 조금은 두터운 바지를 입고 더운 여름날 낮을 텃밭에서 보내야 한다. 가릴수록 더위를 이기고 모기를 피할 수 있다. 더운 한여름의 아이러니이다. 허리는 뻐근하고 무릎은 꺾이는 것처럼 아프고, 다리는 터질듯 저려올 것이다. 벌써 몇 년을 겪으며 쉽게 상상이 가는 그 번거로움과 고단함.. 나는 텃밭을 점점 뒤덮는 검질들을 보며 한 두주 뒤면 그러고 있을 나 자신을 상상한다. 벌써부터 걸음이 어기적거린다.
고추 세 개와 잎이 넓어진 적상추, 버터크런치 상추, 그리고 레드치커리 몇 장을 거두었다. 올해 두 번째 소출이었다. 지난 소출은 친구들과 고기를 굽는데 활용했다. 이번에는 아내와 나 단 둘의 소소한 저녁식탁에 올릴 것들이었다. 흐르는 물에 간단히 흙얼룩을 씻어내고, 물이 빠지는 소쿠리에 담았다. 작은 종지에 고추장만을 담아서 갓지어 따뜻한 흰밥을 한 술 떠서 상추 위에 올리고 고추장만 올려 싸서 먹었다. 맛은 단순함에서 나오지만, 그저 ‘단순한 단순함’은 아니다. 그것들은 갓 거두어서 생기를 한껏 품고 있는 것들이다. 그 생기 때문에 맛이 있고, 단순하기에 그 맛이 온전하다. 가지 맛을 알기 시작하면 어른이라는 말이 있듯, 생기넘치는 단순함에서 맛을 아는 것은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어서일까.. 알고보면 텃밭에 들어갔다 나오며 점점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도, 허리의 통증도 나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한해 한 해 점점 심해지는 것을 보면, 역시 나이를 먹고 있다는 실증이기도 하다. 동시에 생기넘치는 맛을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점점 생기를 잃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잠깐 내린 비에 활기가 넘치는 텃밭에의 서운함을 이내 잊어버리는 이유는, 생명주기의 내리막에서 조금씩 깨닫게 되는 자연의 순리나 에너지에 순응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하다보면 왠지 평온해지는 그런 논리이다. 이 평온에서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 나는 현실에서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만, 생태주의는 본질적으로 극단이고 과격하다. 72세가 되면 공동체 구성원들이 보는 앞에서 자살해야 하는, 그래서 자신이 품었던 생명이 곧 태어날 아기에게로 전해진다는 내용의 영화를 얼마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