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by 캐럴 캐릭 : #가족의 죽음
난 우리 아빠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하다못해 친구들하고라도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아빠 얘기를 꺼내면 친구들이 불편해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아빠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속은 훈훈한 느낌들로 가득 찬다. 하지만 슬펐던 일을 생각하면 마치 댐 뒤로 강물이 꼭대기까지 차 올라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슬픔은 물이 흐르듯 찔끔찔끔 새어 나가기도 하지만, 이렇게 가슴속에만 담아 두다가는 언젠가 슬픔의 댐이 한꺼번에 터져 버릴 것 같아 겁이 난다. (p.7)
아빠가 돌아가신 후 꾹꾹 눌러둔 12살 소년의 아픔이 헤아려집니다. 소년은 가득 찬 슬픔의 댐이 무너지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초연하게 풀어가기 시작해요.
1년 전 소년은 전과 달리 쉽게 피로해하던 아빠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하지만 아직은 어린 나이였기에 현실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지요. 아빠의 건강이 걱정되면서도 예전처럼 놀아주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아빠에게 실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엄마로부터 아빠가 암에 걸렸음을 알게 돼요. 아빠를 어떻게 대할지 겁이 난 소년은 창밖을 바라봅니다. 거리를 오가는 차들. 분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6살 동생 케이티. 나뭇잎을 긁어모으고 있는 이웃집 캘리 아저씨. 아빠는 시들어 가는 나뭇잎처럼 되어가는 데 집 밖의 풍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우리 집에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을까? 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게 생겼는데 …….” (p.28)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어른도 견디기 힘듭니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작가는 순수한 소년의 시선 속에 담담하게 풀어가고 있네요. 1인칭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독자는 누군가의 실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 더욱 화자의 감정선에 빠져들게 됩니다. 저는 독서 후 책날개 글을 보다가 마음이 쿵 내려앉았어요. 이 책이 작가 캐럴 캐릭의 남편을 모티브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작가의 남편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0년 동안 그녀와 함께 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사진과 동화 속 엄마의 모습이 비슷해 보였나 봐요. 물론 저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시간들도 어느새 소년에게 두려운 순간을 가져옵니다. 아빠의 생김새와 목소리를 기억할 수 없는 때 같이 말이에요. 저에게도 아빠는 저와 비슷한 또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20년 전 아빠의 목소리도 이제는 희미한 이미지처럼 보일 뿐이지요. 애써 그려내려 하면 마음만 아릿해집니다. 병치레 한 번 없으실 정도로 건강하셨던 아빠는 체한 것 같다고 하시며 주무시다가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셨어요. 모든 죽음은 이토록 허망합니다. 돌이 될 아이 하나를 둔 저도 아빠의 빈자리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 5년이 걸렸는데 소년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아빠와 생일이 하루 차이인 소년은 그동안 아빠와 생일 파티를 함께 했어요. 처음으로 맞이하는 혼자만의 생일. 소년은 더 이상 파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해요. 저라도 소년과 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런 소년에게 아빠는 꿈에 찾아와 평범한 아침 일상을 나눕니다. 그 후 소년은 친구를 초대해 생일 파티를 하기로 해요. 소년이 좋아하던 아빠의 스웨터에는 더 이상 아빠 냄새가 나지 않지만, 아빠가 소년에게 남긴 사랑은 남은 삶의 걸음을 이어가게 할 것입니다.
급정거할 때 보조석에 있던 딸을 먼저 지켜 주던 아빠의 듬직한 팔. 새로 나온 액션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 같이 보자고 부르시던 오후. 트로트를 듣다가 딸 친구가 차에 타기 전 클래식 음악으로 바꾸시던 아빠의 재치. 새벽녘 거실 창가에서 담배를 태우시던 쓸쓸한 뒷모습. 불어학과를 불교학과로 잘못 들으시고서는 스님이 될지도 모르는 딸이지만 묵묵히 들어주신 후,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걱정의 말씀을 했다는 언제나 딸 편인 아빠. 터프 가이 같던 분이 정작 큰 딸의 출산 후 산부인과에 와서는 딸 얼굴도 못 보고 가신 마음 약한 아빠... 아빠가 내게 남긴 것이 바다처럼 마음에 일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