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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에 관한 기고문 -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by 고덕 Go Duck Jan 21. 2022

통계에 관한 기고문 przycznek do statysyki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 ~ 2012)


백 명의 사람들 가운데

모든 것을 더 잘 아는 사람

─쉰둘


매번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확신이 없는 사람

─나머지 전부 다


비록 오래가진 못할지라도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

─최대한 많이 잡아 마흔아홉


다른 성향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

늘 착하기만 한 사람

─넷, 아니, 어쩌면 다섯


시기심 없이 순수하게 찬사를 보낼 줄 아는 사람

─열여덞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언가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일흔일곱


진정으로 행복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

─최대한 스물 하고 몇 명


혼자 있을 땐 전혀 위협적이지 않지만

군중 속에서는 사나워지는 사람

─틀림없이 절반 이상


주변의 강압에 몰리면

잔인하게 돌변하는 사람

─이 경우는 근사치조차 모르는 편이 나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

─소 잃기 전에 외양간 고치는 사람보다 단지 몇 명 더 많을 뿐


인생에서 몇 가지 물건들 말고는

아무것도 건질게 없는 사람

─마흔

(내가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불빛도 없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여든셋

(지금이건, 나중이건)


연민을 느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아흔아홉


죽게 마련인 사람

─백 명 중에 백 명 모두

이 수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음.



이미지 출처: Tumblr posts - Tumbral.com이미지 출처: Tumblr posts - Tumbral.com


어제 책장에서 정물같이 얌전히 먼지를 쌓아가고 있던 시집을 하나 꺼내 들었다.

작년 초 구입했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이란 시집이다.


쉼보르스카의 시를 처음 접한 건 재작년쯤 류시화 시인의 페이스북을 통해서였다.

불행히도 시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똑바르지만 묘하게 정곡을 파고드는 시의 느낌과 시인의 운율 같은 이름이 주는 신비함은 기억에 남아 작년 봄 정도에 이 책 '끝과 시작'을 구입했다.

그리고는 1년 하고도 반을 더 지나서야 마침내 책을 펼쳐 들었다.

아서왕의 검도 이렇게 뽑기가 힘들었을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엉뚱한 생각일진 몰라도 참 시인다운 이름이란 생각이다.

꺼내 든 책을 딱 펼쳐니 '통계에 관한 기고문'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시를 읽어 내려가며 연이은 감탄을 했다.


천재다


'천재'

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 단어가 언뜻 떠올라버렸다.

'시인'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단어로 별러내는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인간 군상에 대한 경험적 통계까지 어떻게 저처럼 멋지게 시로 풀어내었을까?

거기에 통찰력까지 더하였으니 '천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은 저마다의 경험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속에 쌓아온 인간군상에 대한 각자의 통계를 가지고 있고 각자의 생각과 경험에 따라 통계의 의미는 무척이나 달라지기도 한다.


쉼보르스카는 사물을 관찰하고 언어를 빚어내는 시인의 날카로운 눈을 통해 자신의 삶을 통해 바라보았던 인간 군상에 관해 저렇게 시로 통계에 대한 기고문을 썼다.


그리고 마지막 통계는 절대 불변임을 확실히 일러둔다.

마치 우리에게 그 사실 하나만큼은 절대 잊지 말라고 단호히 말하는 것처럼.


"이 수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바뀐적이 없음"


시의 모든 부분이 좋았지만 내가 특히 좋았던 건 마지막 부분이었다.


연민을 느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아흔아홉


죽게 마련인 사람

─백 명 중에 백 명 모두


나는 이 마지막 두 부분이 삶과 인간에 대한 희망을 얘기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던 나쁨을 가졌던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두 알면서도 백 명 중 아흔아홉은 '연민을 느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시인은 얘기한다.

나의 벗이 종종 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은 누구든 '착한 백성'이다.

누구나 나쁜 습성이 있고 어리석은 부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나쁜 인간'은 아니다.

'나쁜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은 늘 실수하고 후회하며 살아가고 내일이 오면 다시 그 일들을 반복할 만큼 어리석은 군상이지만 좋은 일에는 웃을 줄 알고 함부로 남을 해하려고 하진 않는다.

생각으로는 늘 죄를 짓고 말로는 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깊게 이야기해보면 거의 대부분은 관계와 다스림에 대한 방법을 모를 뿐 순박한 군상이다.

순박하기에 쉽게 상처받고 쉽게 상처도 주며 쉽게 좌절하고 쉽게 기뻐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의 누구나가 자신만의 지혜와 최선을 다해 생을 살아간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최선'이란 것이 꼭 인간이 가진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한계, 자신만의 역량, 자신만의 그릇, 자신만의 생각 그 경계 속에서는 누구나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착한 백성'이다.


그래도 쉼보르스카의 말에 따르면 '한 명'은 부족하다.

백 명 중 아흔아홉은 연민을 느낄 만한 가치가 있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단 한 명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러나 마지막 행에선 이마저도 모두 무의미해진다.

연민을 느낄만한 가치가 없는 '한 사람'마저도 마지막 행에 이르러서는 동등해진다.


죽게 마련인 사람
─백 명 중에 백 명 모두


연민을 느낄만한 가치가 없는 한 사람마저도 결국엔 죽음 앞에선 동등하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백 명에 하나 정도 있다고 해도 세상이 지옥불에 타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곁엔 연민을 느낄 가치가 있는 사람이(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흔아홉이 있으니 이 얼마나 멋지고 살만한 세상인가.

죽음을 제외하곤 '백명 중 백명'이라는 완벽한 통계는 없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음으로써 완벽해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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